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이런 시(詩) / 이상(李箱)

by 언덕에서 2012. 10. 29.

 

 

 

이런 시(詩)

 

                                      이상(李箱. 1910 ∼ 1937)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들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 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 [가톨릭 청년] 2호(1933.7) -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소재가 ‘연애’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사랑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사랑, 그중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인 연애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연애시, 즉 연시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위의 시는 이상(李箱) 김해경이 쓴 연시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 보기 드문 형태의 이 작품은 이상 특유의 풍자(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주제 속에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추고 싶은 욕망이라는 깊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편에서 제시되는 '커다란 돌'과 '어떤 돌', 그리고 나의 관계를 바로 셋째 단락인 '작문'에서 나타나는 '그대'와 '나'의 관계를 통해 비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시는 시인의 전유물이다시피한 자아 분열 현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비유 수법을 통해 나타냅니다.

 첫 단락에서 화자는 '커다란 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셋째 단락의 '사랑하던 그대'를 비유한 것이며, 그 돌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에 버려졌다는 것은 '그대'가 험난한 세파(世波)에 놓여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단락의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라는 구절은 연인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레 떠났음을 뜻하며,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는 '그대'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음을 알려 주는군요.

 셋째 단락의 '작문'은 이 시를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에서 '커다란 돌'이 '그대'를,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에서 '어떤 돌'이 '그대'에게 생긴 새로운 애인임을 짐작케 하네요.

 마지막 단락에서는 화자가, 떠난 연인에 대해 갖는 그리움의 마음을 자신의 연적(戀敵)에게 행여 들켜 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 보는 것만 같'은 것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들통 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화자는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다며 자신을 내면을 실토합니다.

 이 시는 겉으로는 떠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마지막 단락을 읽어 보면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추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2012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수줍은 의식 세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331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간열차 / 이수익  (0) 2012.11.19
몽해 항로 - 당신의 그늘 / 장석주  (0) 2012.11.12
시월 / 이시영  (0) 2012.10.22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0) 2012.10.15
안현미 - 와유(臥遊)  (0) 201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