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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겨울기도 2 / 마종기

by 언덕에서 2012. 12. 3.

 

 

 

겨울 기도 2

 

                                          마종기 (1939 ~  )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 시집 '그 나라 하늘빛'(문학과지성사. 1991. 10) 

 

 

 

 


 

1965년 초여름, 정부가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있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번져나갑니다. 문인들도 한일회담 반대 성명을 내자 신문마다 이 사건을 큼직하게 보도하고, 기사의 끝에는 서명 문인들의 이름이 실립니다. 이때 서명한 많은 문인이 정권으로부터 크고 작은 불이익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데요. 당시 공군사관학교 군의관으로 있던 마종기(馬鍾基, 1939~ )는 장교 통근버스를 타려다가 공군 방첩대원에게 연행되어 어두운 취조실로 끌려갑니다.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금고 2년형을 받게 되어 있던 그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감방에 들어간 지 열흘 만에 기소 유예로 풀려납니다. 사관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는 곧 수원비행단의 기지병원 내과 과장으로 발령을 받지만, 196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공군 군의관 만기 명예제대를 한 뒤 돌연 미국 오하이오에 있는 한 병원의 인턴으로 가버립니다. 그의 이런 결정은 앞서 한일회담 반대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방첩대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고 정부의 폭력을 체험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외국 생활을 시작하고,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저절로 이주민 의식이 배어들게 되지요.

 의사인 그는 1975년에는 오하이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생들에 의해 ‘올해의 교수’로 뽑혀 ‘골든 애플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1980년에 들어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내놓습니다. 이때쯤 되어 그는 향수의 열기와 체관주의의 담담함으로 받쳐진 자신의 내면세계를 차분하게 응시하는 쪽으로 기울어갑니다. 이 시집에 실린 「대화」에서 그는 외국에서 사는 일의 쓸쓸함과 모국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았지요. 전에 이 란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제 상처를 들여다보듯 유랑의 운명적 수락이 낳은 이주민 의식을 관조합니다. 그는 이런 것을 더 발전시켜 이민의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한국인의 보편적 삶에 대한 성찰로 넓혀갔군요. 그의 몸은 안정된 수입이 있는 의사가 누리는 안락한 삶 속에 있지만, 그의 의식은 고통스러운 근대 역사 속을 헤매며 불편해합니다.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지만, 충분히 안락을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성하는 의식 때문에 그는 항상 괴롭고 불편한 것이지요. 그 불편함은 나는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내가 떠나온 조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더구나 그 안에서 사는 대다수 사람도 그러하다는 의식에서 기인합니다.  위의 시는 1991년도에 나온 시집에서 찾았습니다. 『그 나라 하늘빛……. 그가 늘 생각하는 한반도의 하늘빛이겠지요.

 마종기의 시는 흔히들 밝고 투명하다고 합니다. 그의 쉽고 순진한 언어들은 “살아있는 것은 모두 아프다.”는 전언을 실어 나릅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을 거부하고 “탈출과 망명”의 길에 나선 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유랑의 삶입니다. 그의 몸은 미국 중산층의 안락함 속에 있지만, 그 중산층의 삶이 보장하는 안정과 평화가 저 무의식 속에서 끝내 소용돌이치는 귀소 의식을 잠재우지는 못한 듯 보입니다.

 시인은 제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일면, 이를테면 유년 시절, 음식, 거리, 햇빛, 산하를 떠올리고 되씹습니다. 이런 쏠림은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그도 이제 고달픈 유랑을 끝내고 나고 자란 삶의 본디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무의식의 신호로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되는군요. '내가 눈물을 닦으면 / 당신은 웃고 있다…….' 이 시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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