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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사실성은 부족했고, 보는 내내 불편했던 영화 「파란 대문」

by 언덕에서 2012. 9. 20.

 

 

사실성은 부족했고, 보는 내내 불편했던 영화 「파란 대문」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본 후, 그간 빠짐없이 보았던 그의 영화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중 특이한 소재의 영화 「파란 대문」을 소개할까 한다. 1998년 김기덕 각본·연출작으로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세워 내러티브로 풀어낸 이 영화는 ‘여대생과 창녀의 역할 바꾸기’라는 소재가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대중의 평가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신선한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 독창적 영화”(영화평론가 김종원)라는 평과 함께 평단의 주목을 샀다.

 이지은과 이혜은이 주연한 이 영화 <파란 대문>의 첫 장면은 물이 없어 헐떡거리는 금붕어 옆으로 새끼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와 도로를 누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파와 차바퀴 사이로 위태롭게 기어가는 거북은 세상이라는 사막을 건너는 진아의 삶을 상징한 시퀀스다. 또한 새장 여인숙의 파란대문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단순한 출구가 아니라 사회에 소외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가두어 놓는 수단으로 설정된다. 자유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무참히 짓밟히고 문은 닫혀버린다.

 해변에서 자신의 집인 새장 여인숙 파란대문으로 향하는 여대생 혜미는 파란대문 앞에 있었던 창녀 진아와 부딪힌다. 그 때문에 진아의 손에 쥐고 있던 빨간색 금붕어가 비닐 봉투에서 빠져나와 주둥이를 뻐금거린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의 창녀촌이 철거되자 진아(이지은 분)는 포항의 새장 여인숙으로 오게 된다. 이 여인숙의 대문은 파란색이다. 파란 대문이 있는 새장 여인숙은 포주와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일반 가정집이면서 동시에 가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매춘을 알선하는 매음굴이기도 하다. 포주의 가족구성은 포주 부부(장항선, 이인옥 분)와 대학에 다니는 그의 딸 혜미(이혜은 분), 고교생인 아들 현우(안재모 분) 등 4인 가족이다.  새장 여인숙의 대학생 딸과 창녀인 진아는 동갑이다. 딸의 방에 걸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과 여자의 방에 걸어 놓은 에곤 실레의 누드화는 서로 닮은 듯하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학교 세미나에 가는 딸 혜미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낮 시간을 보내는 진아. 진아는 밑줄을 그은 책을 읽고 있다.

 가족이 함께 쓰는 세숫대야나 치약을 두고 혜미는 진아에게 신경전을 벌인다. 창녀와 함께 쓰기에 더러운 것이다. 혜미의 거친 말에 진아는 침묵으로 답한다.

 

 

 

 '겉으로는 한 가족'으로 살아가지만 진아는 밤마다 손님방에 불려 들어가야 하는 데 비해 그 집 딸 혜미는 여대생으로 살고 있다. 혜미는 진아가 몸을 판 돈으로 학교에 다니면서도 창녀인 진아를 더없이 경멸한다. 그러나 진아는 성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혜미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어느 날 혜미의 남자친구 진호(손민석 분)는 파란대문 여인숙에 와서 진아를 통해 성욕을 해결한다. 포주인 아버지 역시 딸 같은 진아를 통해 성욕을 배출한다. 고등학생인  아들 현우는 누드 작품을 찍겠다고 치근덕거리고 마침내 여자의 누드사진 획득과 함께 진아와 성관계를 갖는다. 혜미는 그런 모든 일을 날카롭게 지켜보며  파란대문 안의 갈등은 고조된다. 진아는 성을 팔기 때문인지 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혜미의 집인지 모르고 여인숙에 성욕을 해소하러 와서 진아와 관계를 맺은 혜미의 남자친구로 인해 그들은 실랑이를 한다.

 

 

 

 혜미와의 갈등, 진아의 누드사진 파문과 자살기도 등으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된다. 그림에 취미를 갖고 있는 진아는 자신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건달 개코를 미워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진아는 막상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타당하자 그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그가 떠날 때는 눈물을 흘리는 인간적인 인물이다. 진아와 혜미가 화해하게 되던 그날, 혜미는 자살 기도로 손목을 그은 진아를 대신해서 손님방으로 향한다.

 마지막 장면, 수면 위를 바라보는 두 여주인공의 해맑은 모습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는 작은 물속에서 외로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창녀 진아의 모습이다. 진아는 금붕어를 바닷물에 놓아주면서 자신을 둘러싼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을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을까? 애매하게도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에곤 실레 누드화를 든 여자. 해변의 푸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콘돔으로 풍선을 불어 날려버리는 여자. 에콘 실레의 누드화와 여성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자 그림의 초상과 여성의 얼굴이 어딘지 닮아 보이게 만든다.

 창녀에게 귤을 까주던 남자와 그녀를 때리던 악질 건달, 그리고 몸을 판 돈을 가져가버리는 남자, 이 모두가 동일인이다. 창녀의 누드 사진을 찍겠다고 덤비는 여인숙 집 주인 아들이나, 자신의 여인숙에 고용된 진아를 탐하거나 담벼락에 페인트로 물고기 그림을 그리던 주인집 아저씨 모두 여인숙을 찾는 손님과 다를 바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혜미는 여자에게 묻는다. 자신의 남자와 잤는가?

 "이상하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이렇게 말한 혜미는 진아를 대신해서 손님을 받는다.

 

 

 

 이 영화는 가능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기덕 감독의 불편한 취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김기덕 감독은 안과 밖. 이쪽과 저쪽. 남자와 여자. 진실과 거짓. 생과 사. 이 모든 사이의 경계를 풀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김기덕 감독은 기존의 어두운 '창녀'이미지를 따뜻한 '성인'의 이미지로 재가공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에서 진아는 성자처럼 선하디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 특별한 조건을 따지지 않고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태곳적부터 갈망되었던 욕망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진아는 이상적인 존재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모성은 너무도 관대했기 때문에 항상 남성적 폭력의 희생물이 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춘이 미화될 수 있을까? 김기덕은 매춘을 ‘자본주의의 필요악’으로 간주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논리로 바꾸어버렸다. 여기에서 '김기덕 류의 불편함'은 계속 존재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의견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