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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첫사랑 / 채수영

by 언덕에서 2012. 5. 28.

 

 

 

 

 

 

 

첫사랑

  

                  채수영 (1964 ~  )


태인댁은 엉덩이를 까고

수돗가에서 일을 보았다

언 바닥이 쉬이이 갈라지며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훅 스쳤다

술청에서 손님이 보건 말건 속곳부터 치마까지

뒷수습하는 일도 서두르지 않았다

괜히 달아오른 애송이에게 분 냄새를 풍기다가

묘하게 웃으며 옛다, 꼭꼭 씹어 먹어라

꾸깃꾸깃 말린 홍합 몇 알을 쥐어 주었다

태인집 두 개의 방 가운데 손님을 받지 않는 방에는

남성여중 3학년 10반 67명 중

상급학교에 진학 못한 애련이가

책상 앞에서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애련이 얼굴도 못 본 채

홍합 같은 얼굴로 뒤돌아 나왔다



- 『문예연구』(2011 가을호)




 


 

이 시를 읽으니 오래 된 흑백필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애련이가 시인의 첫사랑으로 여겨지는군요. 시에서 등장하는 홍합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프로이트가 이 시를 보았다면 여자의 성기라고 말할 것 같군요. 소설가 심상대씨는 소설집 <떨림>에서 여성의 그것을 칸나로 비유하더군요. 보는 사람에 따라 상상력은 이렇게 판이한가 봅니다. 아, 이야기가 옆으로 새었군요.

 누구에게나 그리운 시절들이 있지요. 대학시절, 시내의 번화가 술집에서 저는 어릴 적 소꿉친구 미숙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아저씨 옆 좌석에서 교태 어린 목소리로 떠드는 아가씨가 옛 친구임을 알고는 얼굴을 붉히며 그 술집을 나왔더랬지요.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요? 창고에 꼭꼭 숨겨두었던 그 누구와 그 무엇…….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겠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겠지만, 무딜 대로 무디어진 감각의 비곗덩어리 속에 어쩌면 아직도 남아있는 무지개 속의 붉은 감각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금년 초, 이 시가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각광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은 멘트를 달아놓았군요. 한학에 정통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첫사랑, 그 소녀의 이름이 애련일까요? 애련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적어봅니다. 愛戀, 哀憐, 哀戀…….그러고 보니 그 이름에 첫사랑의 감정이 다 담긴 듯 합니다. "사랑하다가 그립다가(愛戀)" "애처롭다가 가엽다가(哀憐)" "서럽다가 그리워지는(哀戀)" 첫사랑이란 그런 마음이 아니겠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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