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려군
박정대 (1965 ~ )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
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
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
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
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
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
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
랑타 딴딴 디 라이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
니엔 푸 이 니엔
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
화이니엔 니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
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치아 쓰 니 디 원러우
그렇다면 지금 그대들이 읽고 있는 이것은 노래인가 시인가,
등려군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쓰는 등려군에 관한 시인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려군의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깊은 밤에, 시란 그런 것이다
<시와사상 2003년 가을호>
<첨밀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당시 그 영화를 보고 홍콩에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1986년 3월. 돈을 벌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작정 상경한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남자인 여명은 어수룩하고, 여자인 장만옥은 영악했지만 그들의 삶은 결국 고만고만해서 홍콩에서의 정신없는 삶에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닭 배달하는 짐자전거를 타고 캔톤로드를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며 가로지르는 장면은 굉장히 이국적이고 낭만적이었어요. 구룡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 거대한 쇼핑몰인 하버시티를 따라 나 있을 뿐 아니라 구찌, 샤넬, 루이뷔통 등 온갖 명품샵들이 자리하고 있는 호화찬란한 캔톤로드는 그들에게 꿈의 장소이자, 또 생활의 장소이기도 했지요. 그것은 홍콩의 모습 자체이기도 합니다. 옛날과 현재가 섞여있고, 부와 빈곤이 섞여 있으며, 꿈과 현실이 섞여 있는 곳이지요. 그러나 그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는 자전거의 모습은 역설적이지만 젊은 시절의 모든 이들에게는 인상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늦은 봄밤, 등나무 그늘 아래서 저도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시인의 표현처럼 이런 순간에 무슨 시가 필요하겠는지요.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됩니다. 꽃의 자태와 감미로운 바람과 아름다운 노래의 조화……. 아니, 듣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시란 원래 그런 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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