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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

by 언덕에서 2022. 8. 28.

 

 

 

파평 윤 씨(坡平尹氏)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족보가 가장 발달한 나라답게 여러 성씨들과 관련된 사연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선조들과 관련된 특정 동식물을 기피하는 성씨도 있다. 파평 윤 씨가 잉어를 먹지 않는 것, 경주 이 씨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이 그런 예다 (경주 이 씨가 자라를 먹지 않는 이유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파평 윤 씨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는 시조 윤신달(893 ~ 973) 및 후손 윤관 장군(? ~ 1111)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 사진)는 윤관(尹瓘 : ? ~1111) 장군이 1107년 동북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 영토를 확장한 후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의 영토라고 새겨진 경계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다.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 : 893(진성여왕 7)973(광종 24))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로 파주군 파평면 늘노리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태어났다화신(華莘)이라고도 불렸으며파평 윤 씨(坡平 尹氏)의 시조이다이후 후손들이 파평현을 근거지로 삼아 토착세력이 되었다.

 그에게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파평에 살던 윤씨 할머니가 물가에 나무 상자가 떠내려가는 것을 건져 열어 보니, 오색의 찬란한 깃털을 한 아기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 같았고, 좌우 갈비뼈 아래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었으며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북두칠성을 수놓은 것 같았고 손바닥에는 尹자 모양의 손금이 그어져 있었다. 성장하면서 용모가 장대하고,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후 윤 씨 성이 붙여졌고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파평 윤 씨 「정정공파세보] 의하면 윤 씨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고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파평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다가 성년에 이르러 유력 재상가의 문객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당시는 신라의 영향력이 미미해지고 후삼국으로 난립해 있던 시기였다. 이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었다. 이 친분은 왕건과 처남·매제 관계로까지 이어졌다.

 

 이 설화는 배경이 연못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라 왕족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탄생신화와 유사하다. 파평윤씨 문중에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집안에서 전해져 오는 다른 설화도 전해진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초 공신. 파평 윤씨의 시조(윤신달장군)

 

 

 파평면 눌노리 지역의 토호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무남독녀가 있었다. 어느 날 딸이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다. 부모는 딸을 문초했고 밤만 되면 딸의 비몽사몽간에 미소년의 방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는 딸에게 미소년이 돌아갈 때 도포 끝에 실에 꿰인 바늘을 꽂도록 시켰다. 실은 눌노리 동네 밖 용연 연못으로 사라졌다. 토호는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서 며칠간 그 연못물을 퍼냈다. 물이 다 없어진 연못 바닥에 잘 생긴 큰 잉어가 비늘 사이에 바늘을 꽂고 펄떡이고 있었다. 잉어는 다산이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영물이기에 다시 연못에 놓아주었다. 이후로 처녀에게 미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딸은 잘 생긴 아들을 낳았고 그는 고려 창업의 훌륭한 인재로 자란 파평 윤 씨 시조이신 태사공 윤신달이다.

 

 이 신화는 크게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탄생설화와 같은 틀이나, 가깝게는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 탄생설화와 닮았다. 유방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유방을 낳았다.

 견훤의 아버지는 지렁이로 알려져 있는데, 지렁이의 어원은 지룡(地龍)으로 땅에 있는 용이라는 의미다. 이는 지렁이가 농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으로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지렁이다. 견훤이 지렁이로 상징되는 농경세력이라면 잉어를 표방하는 윤신달은 파주 근처의 해상세력임을 반증한다.

 

<윤관의 9성은 일본학자들이 내세운 함흥평야가 아니고 간도 지역이라는 주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

 

 

 

 잉어와 파평 윤씨에 대한 또 다른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 장군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전쟁 중에 여진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후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 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윤관은 잉어 떼가 다리를 놓아 자신을 건너게 했다고 해서 그 포구 이름을 모일‘徒’ 비늘‘鱗’ 자를 써서 도인포(徒鱗浦)라 부르도록 했다.

 

 이 설화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전설에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개의 설화에는 잉어가 있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

 

고려 문신 윤관 (? ~1111)

 

 

조선 무신(다대첨사) 윤흥신 (尹興信, ? ~ 1592년) : (사진출처 : 부산일보)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가 되면서 외척으로서 상당한 정치적  세력을 갖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학문과 정치 일선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윤관에게는 아들이 7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번성하여 여러 분파가 생기면서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명성을 유지했다. 그 가운데서도 주로 판도공파와 소정공파에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 윤씨의 8할 가량이 된다.

  판도공파는 윤승례의 아들이며 세조의 장인인 윤번 대에서 다시 제학공파·부윤공파·정정공파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에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어진다. 그의 맏아들인 윤사분은 우의정, 둘째 윤사균은 예조판서, 셋째 윤사흔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윤사균과 윤사흔의 딸이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됨으로써 경쟁관계가 되었다. 윤사균의 증손 윤임의 여동생이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인데, 장경왕후는 세자를 낳고 엿새만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가 된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明宗)을 낳게 되자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파가 대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중심이 된 소윤이 정치적 갈등을 빚었다.

 

 

조선 문신 윤증(尹拯,1629~1714)

 

 

 학문적으로는 예학에 밝았던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이 있다. 그는 유계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장인인 김집에게서도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회천에 거주하고 있었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예론에 가장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1663(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모두 사퇴하였던 인물이었다.

  


 

 

 파평 윤씨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하여 조선시대에는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현재에도 해평 윤 씨, 칠원 윤 씨 등 여러 윤 씨가 있으나 파평 윤 씨는 그 가운데서 가장 번성한 집안이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윤관·윤언이와 같이 나라의 어려움을 솔선수범하여 막아낸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명족이다.

 

 지난 2002년 ‘족보문화연구원’이 한국의 명문명벌을 선정한 적이 있다. ‘한국의 8대 명벌’을 선정했는데, 고려 및 조선의 재상급 관직을 지낸 인물 수와 왕비 숫자를 합산했다. 조사 결과 한국의 8대 명벌로 남양 홍씨, 청주 한 씨, 안동 권 씨, 광산 김 씨, 경주 이 씨, 문화 류 씨, 여흥 민 씨 등과 함께 파평윤 씨가 선정됐다. 또 조선 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3대 가문에도 청주 한씨(5명), 여흥 민 씨(4명)와 더불어 파평 윤 씨(4명)가 이름을 올렸다.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등이 파평 윤 씨다.

 

 

독립운동가 윤봉길 (尹奉吉 ; 1908~1932)

 

 

 

 

민족 암흑기의 시인 윤동주 (1917 ~ 1945)

 

 

● 파평 윤 씨 시조 태사 윤신달은 문무를 겸전 인의지도를 제창 파평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하는데 강을 건널 적에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 하며 말이 물을 마신 나루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하여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조시대 철공(대장간)하는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가 직사 하였다 하며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 서기 1117년(고려 예종 12)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좌리평계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 지군국 중사(推忠左理平戒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判尙書 吏部事 知軍國 重事)가 되어 943년 왕건 태조가 승하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신달은 삼남지방을 평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임명 경주 대도독부에 52세에 부임되었으나 30년 만에 다시 돌아와 81세로 서거하니 태사 삼중대광으로 추증하고 경주 기계현 아치동(현 영월군 기계면 봉래동)에 구봉산 사원에 국장을 지냈다 한다.

 

● 조선조 영조 때 경주 유림들이 봉강서원을 건립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던 중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후 자손들이 묘 옆에 묘사를 건립 매년 음 10월 1일과 한식일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에 파평 윤 씨 과거 급제자는 1,424명이 있다. 문과 340명, 무과 86명, 사마시 934명, 역과 41명, 의과 11명, 음양과 2명, 율과 10명이다.

 

●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윤(尹) 씨는 1,020,547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8 위이며 파평 윤(尹) 씨는 770,932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9위이고 성씨 내 본관별 순위는 1위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파평 윤(尹) 씨는 전체 가구수가 221,477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713,947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9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1위로 나타났다.

 

 

 


  1. 윤흥신 (尹興信, ? ~ 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제3계비 장경왕후의 조카이고, 대윤 윤임의 아들이다. 진천현감 등을 거쳐 다대포 첨사로 재직 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 다대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윤흥신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부산진 함락 이후 첨사 윤흥신과 군사 800명이 지키는 다대진을 공격해왔다. 윤흥신 장군은 아우 윤흥제와 함께 적은 병력으로 분전하여 1만의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대부분의 물자를 소비한 조선군은 다음날 다시 왜군의 재공격을 받아 모두 순국했고 윤흥신은 아우 윤흥제와 함께 성에 남아 끝까지 항거하다가 전사했다. 증직으로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뒤에 다시 증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었다. 1736년(영조 12) 동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본문으로]
  2. 파주문화원 홈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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