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의 요지경 같은 이야기 『유양잡조』
중국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803∼863)이 엮은 이야기책으로 30편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부총간 四部叢刊≫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 들어간 유양(酉陽)은 호남성(湖南省) 원릉현(沅陵縣)에 소재하는 소유산(小酉山)을 지칭하며, 잡조란 기이한 일이나 정보를 마치 도마에 올려 음식을 늘여놓듯이 풀어놓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비서(秘書)를 기록하고 이사(異事)를 서술하여 선불인귀(仙佛人鬼)로부터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기재하고 있는데, 같은 유(類)를 모아 마치 유서(類書)처럼 보인다. 단성식은 집에 기이한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고 박학강기(博學强記)했으며 더욱이 불서(佛書)에 조예가 깊었다. 책이름은 양(梁) 나라 원제(元帝)가 지은 부(賦) <방유양지일전 訪酉陽之一典>에서 따온 것이다. 인용한 책 가운데에는 이미 그 원전이 없어진 것들도 있어서 문헌적 가치도 높다. 이 책은 저자가 섭렵한 바가 넓고 진기한 바가 많아서 세상에서 전기(傳奇)와 더불어 애완(愛玩)되었다고 한다.
또 이 책에는 ≪흥부전 興夫傳≫의 근원설화(根源說話)라고 일컬어지는 ‘방이설화’가 수록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국문학 연구자들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가(金哥)는 신라국의 왕족이다. 그의 먼 조상 중에 '방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동생은 큰 부자였다. 그래서 형 방이는 동생한테 빌어먹었다. 그렇지만 심술 고약한 동생은 밭뙈기 하나를 주면서 종자와 누에는 쪄서 주었다. 다행히도 곡식 종자 중 하나가 자라나니 방이는 밭에서 이를 지켰다. 이때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이삭을 꺾어 물고는 대여섯 리쯤 날아 산으로 올라가서는 바위틈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바위를 지키던 방이는 한밤중에 밝은 달이 뜨자 붉은 옷을 입은 아이 한 무리가 금방망이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며 금방망이를 두드리자 그것이 나타났다. 한참 만에 아이들이 방망이를 바위틈에 꽂아두고 사라지자 방이를 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부자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생도 같은 수법으로 형이 금방망이를 얻은 계곡으로 갔지만, 도깨비들은 그가 금방망이를 훔쳐갔다며 그의 코를 뽑아 코끼리처럼 만들어 버렸다. 마을로 돌아온 동생은 부끄럽고 분통한 나머지 죽고 말았다.
이 정도면 흥부전과 도깨비 방망이를 적당히 버무린 동화 아닌가 하겠지만, 이는 놀랍게도 중국 당나라 말기 시절 문인 단성식(段成式. 803~863)이 엮은 기이한 이야기 모음집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온 내용이다.
신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도 도깨비 방망이 말고도 더러 있다. 예컨대 당 측천무후 때 신라 사신을 수행하다가 바람에 떼밀려 신라의 장수국(長鬚國), 즉 수염이 긴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가 겪은 일을 적은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도 있다. 수염이 긴 사람이란 새우를 말한다.
유양잡조에 부친 서문에서 단성식은 이 책이 기이한 일을 기록한 '지괴'(志怪)이면서 소소한 이야기집인 '소설'(小說)이라고 했다. 실제 이에 수록된 각종 이야기는 요지경 이야기로 점철한다. 이들 이야기의 시ㆍ공간은 광범위해 도깨비 방망이처럼 신라를 무대로 삼은 게 있는가 하면, 단성식과 동시대 이야기도 많다.
책에 수록된 이야기 소재는 역대 중국 임금과 관련한 기이한 사적과 하늘의 영험을 필두로 도교와 불교의 기이한 사적, 기이한 풍속과 술법, 기예와 음악과 기물, 세간의 속설, 무덤의 비화, 귀신과 요괴, 당나라 서울 장안의 사찰 유람기, 기타 동식물 이야기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다.
이 중 속집 권1에 수록된 남방 지역 전래 이야기인 '섭한(葉限) 이야기'는 그 스토리 구성이 서양의 신데렐라 동화와 매우 흡사하다 해서 학계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서양의 이야기 신데렐라는 1697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옛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단편집 [교훈이 담긴 옛날 이야기와 꽁트]에 처음 실렸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그 보다 800년이나 앞서 출간된 당나라의 수필집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오는 예쉔(葉限)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쉰은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힘겹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친구처럼 기르던 붉은 비늘 물고기를 계모가 잡아 먹어버리자 그 뼈를 가져 와 슬퍼하고 있는데, 물고기의 신령이 나타나 예쉔을 도와주었고 신령이 선물한 화려한 옷과 황금 신발을 신고 마을 무도회장으로 갔다가 계모와 배다른 언니에게 들켜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고, 그 황금 신을 본 왕이 수소문 끝에 예쉔을 찾아내 결혼을 한다.
이 이야기는 남방 지역인 인도네시아의 고대민담에도 고스란히 같은 이야기로 존재하고 있다.
'물고기 / 싹이 터라 / 크고 훌륭한 / 나무가 되어다오 / 아름다운 잎을 / 많이 달아다오'
이 부분은 계모와 언니들이 먹어치운 잉어의 뼈를 땅에 묻고 애도했던 인도네시아 동화 속 여자아이의 노래이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도 같은 계열의 이야기인데 우연히 비슷한 이야기다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유양잡조]와 그 속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이 동서양과 중동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퍼져갔고 800년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는 프랑스 작가의 꽁트로 부활했다는 것이 여러 가지 역사 이론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학술적 가치가 있고 읽기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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