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 놓인 인간의 마음을 그린 영화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영화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이오지마 섬에서 미군(10만)에 대비 압도적 열세인 화력과 병력(2만)으로 끝까지 저항하다 자결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담고 있다. 2006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그러니까 일본 배우와 일본어로 된 미국 영화인 셈이다)는 미국의 적국이었던 일본군들의 죽음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거나 개죽음이라는 식으로 단정 짓지 않고 제삼자의 담담한 시각에서 전개한다.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앞둔 개인의 사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죽음이 집단적인 동시에 개별적 죽음임을 보여준다. 영화에 몰입하노라면 전체를 그리면서 인물 하나하나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은 아닌 게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솜씨를 연상시킨다.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그들은 어딘가에 내던져졌고, 그곳에서 살아내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육체적으로 버틴다”고 한 말은 적절해 보인다.
이스트우드는 그런 최선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비극을 그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한다. 가족을 두고 전장에 내몰린 일본군과 미군의 애잔한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탓에 일제 식민지 치하 일본인들의 극심한 피해를 받은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을 수 있어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못했고 DVD로만 출시되었다. 이 영화를 몰입해서 본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문화부의 조치를 일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중앙의 군인이 영화 속 쿠리바야시 장군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오지마에 부임한 첫날, 쿠리바야시 장군(중장)은 섬을 직접 돌아보던 중, 군대생활을 불평하다 장교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고 있는 사이고와 다른 병사를 구해주게 된다. 쿠리바야시는 부하 장군, 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안 요새를 버리고 섬에 터널을 파라고 명령한다. 모두들 시간 낭비라며 쿠리바야시 장군에 불만을 품지만 결국 터널을 파기 시작한다. 시미즈는 사이고의 연대에 새로 파견되어 합류하고, 연대의 장교들은 시미즈를, 자신들을 감시하라고 헌병대가 보낸 스파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이오지마 섬의 남쪽 봉우리 수리바치가 함락되자, 아다치 중령은 쿠리바야시 장군에게 연대원들과 모두 자살을 하겠다고 허락을 구하나, 쿠리바야시는 그에게 현장에서 철수해 북쪽 동굴의 군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명령을 어기고 아다치와 연대원들이 자살을 하자 시미즈와 사이고는 도망쳐 북쪽 동굴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이토 중위는 이들을 동료들과 함께 자살하지 않고 도망친 비겁한 병사들이라며 목을 베어 죽이려 한다. 그 순간 쿠리바야시 장군이 나타나 자신이 철수를 명령했다며 이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시미즈와 사이고는 함께 탈영하여 항복하기로 하지만, 먼저 탈영한 시미즈가 미군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결국 남은 병사들은 모두 작전 본부로 돌아가지만, 이미 무기와 식량은 동이 난 상태다. 그들은 지렁이를 잡아 먹으며 연명한다. 마지막 전투, 쿠리바야시 장군은 돌격의 선봉에서 치명상을 입은 뒤 사이고에게 자신의 시체를 미군의 눈에 띄지 않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미군에 의한 최후의 일제 공격으로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 뒤, 혼자 살아남은 사이고는 미군에게 발견되어 안전하게 후송된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일간 최고 격전이었던 이오지마(유황도) 전투를 일본군 입장에서 찍은 영화다. 그러나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든지 일본편애 영화 색깔을 보이진 않는다. 이 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제작한,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또다른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아버지의 깃발'은 지난 2006년 2월 국내에 개봉됐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결국 개봉되지 못했다.
이스트우드가 <아버지의 깃발>와 함께 연출한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를 보지 않았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노쇠한 마초형 배우/ 감독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나의 전쟁을 적국인 두 나라의 시점에서 찍은 사상 초유의 시도인데 시점이나 이야기가 전혀 다른 두 영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쟁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같은 거대한 예술품에 압도되는 경험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스트우드는 관객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이스트우드의 두 영화에서 전투장면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는 전장의 입체적 체험 대신 전장에 놓인 인간의 마음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죽음을 앞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맹목적임, 개인은 없고 국가만 존재하는 부조리, 군국주의와 전쟁이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를 쓴 흔적이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라고 해야할 것이다. 죽은 동료에 대한 죄의식, 살아 돌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불안, 두고 온 처자식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야말로 이스트우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으로 보인다.
이오지마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이 전쟁을 미국과 일본의 관점으로 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이스트우드는 <아버지의 깃발> 제작 중 이오지마를 방어한 쿠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와타나베 켄)에게 흥미를 느껴 일본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다시 보는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정치적 논란 속에 국내에서 개봉하지 못했다. 때문에 형제처럼 짝패를 이루는 두 영화를 마침내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DVD는 매우 매력적이다. DVD는 본편을 담은 디스크 2장과 각 영화에 해당하는 서플먼트 디스크 2장으로 구성돼 있다. <아버지의 깃발> 서플먼트에서는 실제 이오지마 전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인상적이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 학교에서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는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비로소 접하며 실망과 뿌듯함이 혼재했다는 이야기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측의 망원경을 든 남자가 영화 속 '쿠리바야시 중장'이다>
제32회 일본 아카데미상(2008) : 최우수 외국작품상, 제12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2007): 외국어 영화상, 제7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07): 음향효과상, 제6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2007): 외국어 영화상, 제19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2006): 외국어 영화상, 제32회 LA 비평가 협회상(2006) : 작품상 수상.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는 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이오지마'(硫黄島, 유황도)로 불렸다. 미국은 향후 일본 주요 도시를 공습하기 위한 공군기지로 사용하려면 이오지마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본토에 속해 있는 섬이기 때문에 일본 측도 공격군에 최대한의 손실을 입히려는 결의가 확고했다. 일본은 병력을 2만 1,000명 이상으로 늘려 가능한 한 장시간 버틸 작정이었다.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1945년 2월 19일 오전 9시, 해군 함대와 공군이 격렬한 폭격을 퍼부은 뒤 해병대 제4사단과 제5사단이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즉각적인 저항은 없었지만, 내륙을 향해 진격하자 일본군 보병과 포병 벙커에서 맹렬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가 막을 올렸다. 35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미국은 2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 216개 중대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2만 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이오지마 섬의 남쪽에는 스리바치 산이 우뚝 서 있다. 전투 개시 4일째, 미해병대는 스리바치 산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였다. 2월 23일 소규모 척후대가, 그리고 뒤이어 1개 소대 전체가 정상에 올라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일본 영토에 최초로 휘날린 외국 국기였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은 AP 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은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위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栗林忠道)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이후 일본군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유일한 전투가 1945년 2월 19일부터 시작된 이오지마 전투였다. 미군 측 사상자는 2만8천686명(전사 6천821명, 부상 2만1천865명), 일본군 전사자는 수비 병력의 90%를 넘는 2만219명이었다. 이에 기겁을 한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을 포기하고 원자폭탄 투하로 전략을 바꿨다. 이 전투를 이끈 일본 측 지휘관이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이다. 나가노현 출신으로 1911년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미국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이때 미국의 국력을 실감한 그는 훗날 '미국과 벌이는 전쟁은 절망적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1944년부터 이오지마 수비대를 지휘했다. 2만 여명의 일본군은 지하진지를 구축하고 10만 명의 미군에게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패한 다른 일본군 지휘관이 그러했듯 남은 부하 300명과 함께 최후의 돌격으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되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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