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Pyeongyang... <디어, 평양>
2006년 재일교포 다큐멘터리 감독인 양영희가 제작한 이 영화는 특별한 가족사 안에 담겨진 가슴 아픈 분단의 역사, 그 안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양면적인 삶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특별한 사적 다큐멘터리이다.
조총련계 오사카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양영희에게는 언제나 두 개의 상반된 세계가 존재했다. 그것은 수령님에 대한 충성으로 구축된 학교 안의 세계와 비틀즈의 음악이 존재하는 학교 밖의 세계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답안지에 정답을 꼼꼼히 채워넣는 모범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와 음악을 즐기며 일본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하던 그녀는 그러나, 곧 벼락같은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다. “진로 상담을 하는데, 선생님이 내게 ‘너에게는 선택이 없다. 부모님의 뒤를 따라서 조총련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얼음물을 끼얹던 것 같던 진로 상담을 계기로, 그녀는 배웠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곧 조국과 충성과 혁명의 세계는 빛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것”에 충성을 바치는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부녀간의 충돌은 사소한 말다툼부터 시작됐다. TV에서 북한의 매스게임이 비쳐질 때면 아버지는 “역시 훌륭하다”며 찬사를 보냈고, 그때마다 그녀는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저짓이 뭐람”이라며 대드는 식이었다. 조총련계 대학에 진학했지만, 시험 때면 백지를 제출했고 수업 대신 연극과 영화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조총련계 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했지만, 결국 3년 만에 학교를 뛰쳐나와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자연히 아버지와의 갈등도 깊어졌다. “어떻게 조총련 간부의 딸이 연극쟁이를 하냐”며 화를 내셨다. 20대 후반에는 갈등이 극에 달해서 서로 말을 하기는커녕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이 영화 < 디어, 평양>은 가장 가깝고도 먼 도시, 일본 오사카와 북한의 평양에 살고 있는 어느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을 겪어 왔던 재일동포의 애환과 굴곡진 사연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족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던 이별의 회한,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보는 이들에게 가슴 먹먹한 여운을 안겨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나는 ‘재일 교포의 메카’로 불리우는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부모님 슬하 오빠 셋 아래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다.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해 열렬히 프러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신다.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국’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다.
오빠들이 떠나던 날. 6살이었던 나는 ‘귀국’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평양의 궁핍한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다.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 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 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신다.
오빠들과 달리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는 자연히 아버지와 갈등이 깊었고, 심지어 대화조차 안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 볼 것을 결심했고 10년간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점차 변해 갔다.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미움은 그리움으로, 갈등은 사랑으로 변했다. 어느 날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되느냐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그렇다’는 진솔한 답변을 해 주셨고 난 앞으로 아버지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나는 아버지와 좀더 일찍 대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조총련계 부모를 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양영희의 고향이자 그녀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시는 재일동포 역사의 산중심지로 전체 인구의 1/3이 재일동포일 정도이다. 특히, 이곳에 제주도 출신이 많은 것은 1930년대 자원과 물자가 한정된 제주도에 일본이 해군기지를 세우면서 주민들이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다수가 이주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북한과 남한으로 등을 돌린 한반도의 정세는 재일동포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과 북한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되고 일본의 노골적인 민족차별로 어려움에 처했던 대다수의 재일동포들이 재일동포의 인권과 민족교육을 위해 막대한 자금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북한을 선택하게 되었다.
1955년 6.25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북한은 ‘재일동포’의 귀환을 추진, 1959년 북한과 일본정부는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을 정식 조인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2월, 975명의 재일동포가 니가타항을 출발하여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귀환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이 북송 사업은 1984년까지 계속되어 총 186차례에 걸쳐 9만 3천 4백여 명이 평양으로 이주를 했다. 북한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혜택을 주는 ‘지상 낙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녀의 세 오빠들도 70년대 초, 일본의 민족차별에서 벗어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린 나이에 ‘만경봉호’에 몸을 실었다.
평생을 바칠 만한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어야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세월 속에 변하는 것과 변함없는 것 혹은 변할 수 없는 것들을 때로는 멀찍이서 때로는 코앞에서 응시하는 양영희 감독이 늙어가는 부모와 쇠락하는 북녘을 대하는 태도는 거의 비슷하다. 마냥 뿌듯할 수도, 무작정 슬퍼할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해 감독은 섣불리 가치판단하지 않고,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게 된 감독의 변화는 영화 속에 그대로 반영된다. 세상에는 때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이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북한의 암울한 현실을 비난한다든지, 남한의 자유와 경제력을 인정하려는 부분조차 찾을 수 없는 체제무관심형 영화라 할 수 있다. 단지 조총련계 재일교포 양영희 가족에만 포커스를 고정시켜 담담하게 전개되는 낮은 목소리가 호감가는 영화다. 2006년 일본과 한국에서 <디어 평양>이 개봉 후, 양영희 감독은 북한으로부터 입국금지령을 받았다. 제5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2006) 폭스바겐강 후보, 제22회 선댄스영화제(2006) 심사위원특별상 후보, 제9회 야마카타 국제다큐멘타리 영화제(2005) 뉴아시아흐름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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