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역류해서 과거로 <박하 사탕>
이 영화는 1999년 이스트필름(East Film)과 일본 NHK가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이창동이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등이 출연하였다. ‘박하사탕’이라는 추억이 담긴 소재를 통해 20여 년의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이다. 첫 장면은 ‘가리봉동우회’의 야유회 장소로 시작되며, 그 장소는 영화의 끝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구로구 가리봉동은 영화 속 주인공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젊음을 시작한 곳이다.
이 영화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이창동의 <초록물고기>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그는 '시간을 역류해서 과거로 또 과거로 돌아가 한국인들은 어떤 시간을 거쳐 왔는지,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추적해 보고 싶었다'는 연출론을 밝혔다. 이 영화가 관심을 얻었던 주요 요인 중의 하나는 철저하게 무명 배우들을 기용해 극이 노리고 있는 사실감을 높여 주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상영시간은 127분이다. 중년남자 영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순수했던 청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연극의 막과 장처럼, 제목과 에피소드 형식으로 개인사를 한국 현대사와 중첩시키는 독특한 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야유회[1999년 봄], 사진기[사흘 전, 1999년 봄], 삶은 아름답다[1994년 여름], 고백[1987년 4월], 기도[1984년 가을], 면회[1980년 5월], 소풍[1979년 가을] 등 7개의 소제목과 에피소드를 통해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국 현대사의 사회상과 개인사를 그리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극은 1999년 봄 영호(설경구)가 20년 전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함께 왔었던 기찻길 아래 강가를 찾아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면서 그의 삶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그 이유가 조금씩 드러난다.
●야유회 <1999년 봄> : 젊은 시절의 꿈, 야망, 사랑, 모든 것을 잃은 중년의 영호. 그는 20년 전 첫사랑과 함께 소풍을 나갔던 곳에 찾아가지만 20년이란 세월은 모든 것을 앗아 가버린 후이다. 그는 열차선로 위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부딪혀 자살한다.
●사진기 <사흘 전, 1999년 봄> : 동업자에게 사기당하고 마누라한테 이혼당하고 아무 것도 남은 것 없는 마흔 살의 영호. 어렵사리 구한 권총 한 정으로 죽어버리려 하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사내의 손에 이끌려 첫사랑 순임을 만나게 된다. 순임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삶은 아름답다 <1994년 여름> : 서른 다섯의 가구점 사장인 영호. 마누라 홍자는 운전교습 강사와 바람을 피우고 그는 가구점 직원 미스 리와 바람을 피운다. 과거 형사시절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과 마주친다.
●고백 <1987년 4월> :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권태로움에 지쳐버린 닳고 닳은 형사, 영호. 홍자는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만삭의 몸이다. 그러나 군산의 허름한 옥탑 방에서 카페 여종업원 품에 안긴 그는 순임을 목 놓아 부르며 눈물을 터뜨린다.
●기도 <1984년 가을> : 신참내기 형사 영호. 그는 선배 형사들의 과격한 모습과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폭력성에 의해 점점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부인하듯 순임을 거부하고 자신을 짝사랑 해왔던 홍자를 택한다.
●면회 <1980년 5월> : 영호는 전방부대의 신병이다. 그는 자신을 면회 왔다가 헛걸음치고 가는 순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호는 그녀를 소리쳐 부르고 싶지만 다른 장병들의 휘파람 소리와 요란한 트럭 소리에 묻혀 그저 그녀를 떠나보내고 긴급 출동하는 트럭에 올라탄다. 행선지도 모른 채 군용트럭을 타고 온 곳이 전라남도 도청소재지 광주다. 1980년 봄 광주의 한가운데 있던 그는 그곳에서 밤늦게 귀가하던 여고생을 당황한 나머지 총으로 쏴 죽이고 울분을 토한다.
●소풍 <1979년 가을> : 갓 스무 살의 영호와 순임. 그들은 난생 처음 순수한 사랑의 행복감에 잔뜩 젖어있다. 영호는 순임이 건네 준 박하사탕 하나가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 젊음도 아름답고 인생도 아름답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79년의 어느 가을이었다. 영호의 1979년 스무 살은 순임과 함께 야유회에서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말없이 주고받는 깨끗한 영혼의 표상이다.
이 영화는 중년 남자의 20년 인생 역정 속에 한국 사회 20년에 대한 통찰을 그린 리얼리즘 영화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픈 이면을 드러내고, 박하사탕처럼 순수하고 맑았던 젊은 시절을 통해 인생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영화의 정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이창동은 현재의 우리 삶에서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지금까지 문학이나 연극, 여타 장르에서 다루어진 광주는 ‘피해자’이며 ‘항쟁자’의 처지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비장하며 영웅적인 모습은 그들 작품의 도처에서 형상화된 채 나타났다. 하지만 <박하사탕>은 그 반대편에 서있지만 동시에 ‘폭력과 광기의 역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희생자인 ‘권력의 하수인’의 눈을 통해 역사를 거꾸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바깥에서 거꾸로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밝은 바깥을 바라보는 이창동의 탁월함과 냉소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는 측면인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이 영화의 어디 한구석에도 따뜻함이 없다. 쓰레기처럼 허접해져 가는 한 인간의 광기어린 삶만이 존재할 뿐이다. 순순함의 상징이었던 순임은 암에 걸려 죽어가고 시대의 부산물인 삶을 영위하던 그는 파멸한다. 이창동은 관객에게 희망의 불빛을 보여주는 대신 텅 비고 외로운 절망을 보여주고 만다. 이런 가운데 하나의 대사, 운동권 청년의 일기장 속에 적혀 있던 글귀, 세 번째 막의 화두 ‘삶은 아름답다’란 말은 역설적임 그 자체이다.
이 거꾸로 된 차가운 시선, 역설의 미학을 통해, 이창동은 비로소 ‘광주’와 우리의 지난 시대를, 마침내 보편적인 인식의 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더 이상 지역적인 문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나누어지는 양단논법도 아닌, 우리들의 보편적인 역사이며, 우리들의 삶의 기록이라는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제 우리의 역사 인식이 단순히 과거 되돌아보기나 ‘회고담’이 아닌 예술을 통해 마침내 승리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창동 자신의 영광이 아닌 우리 모두의 영광이기도 할 것이다’ 라는 어느 평자의 글은 타당하고 지당해 보인다.
2000년 제8회 춘사대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설경구]과 각본상[이창동]을 수상하였으며, 제23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조명상[이강산]을, 제36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신인연기상[설경구]을 수상하였다. 또한 동년 개최된 제37회 대종상영화제에서도 신인남우상[설경구], 여우조연상[김여진], 시나리오상[이창동], 감독상[이창동], 최우수작품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하였으며, 제21회 청룡영화상에서도 각본상[이창동], 남우주연상[설경구]을 수상하였다. 2000년 개최된 제35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특별상[장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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