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을 위한 변명 <희생>
영화〈희생〉(1986)은 193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86년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한 세계적인 명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철학적이며 사변적이어서 신과 인간의 문제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심오함이 깃들어 있다. 구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이 위대한 영화감독은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향수(1983) 발표 뒤 1984년 망명하였는고 1986년 사망한 해에 만들어진 <희생)은 그의 유작인 셈이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자신의 태를 묻은 조국을 버리고 망명지에서 만든 영화이니만큼 희생 이 타르코프스키에게 지닌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 영화를 만들 무렵 그는 암과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바흐의 음악과 함께 성모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세 왕의 찬미>라는 그림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은퇴하여 가족들과 함께 사는 대학교수 겸 연극배우인 알렉산더(얼란드 요셉슨 분)는 막내아들과 함께 죽은 묘목 한 그루를 바닷가에 심는다. 그는 원인 모르게 말문을 닫아버린 막내아들에게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어 마침내 그 나무에서 꽃을 피게 만들었던 한 수도승의 일화를 들려준다.
알렉산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 3차 대전 발발 소식이 들려온다.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지금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알렉산더는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는 신에게 만약 내일 아침잠에서 깨었을 때 세상이 오늘과 다름없이 평화롭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우체부 오토(앨런 애드월 분)는 이런 알렉산더에게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 그것은 아이슬랜드에서 온 이방인 처녀 마리아(발레리 메레스 분)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된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다. (이 부분은 참으로 난해하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오토의 권유임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지만 알렉산더는 거절당하고 만다. 사명감에 가득찬 알렉산더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자신의 청을 들어줄 것을 강요하고 결국 그녀와 동침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두 사람이 누운 침대가 공중에 떠있는 이상한 꿈을 꾼다.
다음날 아침 알렉산더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아무 일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기도를 신이 들어주신 것으로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집을 불태우고 결국 정신병자로 몰려 앰블런스에 실려간다.
그리고 얼마 후 말문을 닫았던 알렉산더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심은 죽은 묘목 아래 누워 입을 연다. 막내아들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뭔가요, 아빠?"라는 질문을 던진다. 놀랍게도 막내아들이 누워있는 묘목은 정성을 다한 막내아들의 물주기 때문인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화면이 나무의 밑 둥에서부터 천천히 커지면서 나무 가지 사이 저 너머로 눈부신 강물이 반짝이고 있다. 배경 음악으로〈마태수난곡〉중 제47곡인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와 ‘나의 아들 앤드류사에게’라는 안드레이 타르코프키의 헌사가 자막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 현대 과학 물질문명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신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처절한 진혼곡이다. 세계적 촬영 감독인 스벤 닉비스트의 유려하고 장중한 화면은 타르코프스키의 경건한 종교적 탐구의 철학과 어우러져 한 편의 철학적 우화를 완성하고 있다.
이 영화 <희생>은 빛나는 시적 상징과 몽환적인 화면을 특징으로 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답게 전통적인 줄거리를 지녔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는 다소 자연스럽지 못해 미흡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짧지 않은 상영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명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이지요?’라는 어느 소년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역사를 위한 변명>을 저술했다고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 고센이 던진 ‘아빠,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란 무슨 뜻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영화 <희생>을 통해 ‘인류문명을 위한 변명’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채 구원만을 바라는 끝없는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인구의 절반은 굶고 있고 1/3은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한결 맑게 된 것을 느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인간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을 만나게 해 주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을 보이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한다면 타르코프스키야말로 예술가의 임무에 충실한 영화감독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알렉산더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직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류를 구하고자 신에게 서원하는 대목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통해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보기에 인간의 조건은 '소유'가 아니고 '희생'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행복해 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개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인간들일 뿐이다. 진흙탕 수렁 위를 걷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니체가 경멸한 퇴폐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현대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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