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

인생은 짧으니 사랑에 빠지세요 <이키루>

by 언덕에서 2011. 11. 16.

 

인생은 짧으니 사랑에 빠지세요 <이키루>

 

 

 

 

 

‘이키루’는 ‘삶’이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오래전인 1952년에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이 흑백영화는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는 평이 많은 영화이다. 흔히 재미있는 영화라 한다면 멜로, 스릴, 모험, 서스펜스 등의 요소가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재밋거리와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 지루해질 수도 있다. 나의 지인 중에는 이 영화를 다섯 번 본 분이 계신데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지나온 삶을 반추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요즘 영화는 볼 때는 순간 몰입하여 재미있었지만 영화관을 나서고 나면 무엇을 보았는지 줄거리마저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남자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 낸 휴머니즘 영화의 걸작이다. 일본의 중소도시 시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근대 관료주의의 무사안일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의 영화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살다’라는 뜻의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에 전체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각본의 기본 설정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극중에 이를 암시하는 대사도 나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청에 근무하며 ‘시민과장’직에 머무른 공무원 와타나베 칸지는 30년 동안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고 여러 차례 표창을 받은 모범공무원이다. 젊어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아내가 죽었지만 그는 재혼하지 않고 아들을 키워 며느리도 본 상태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이 간암에 걸렸으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그는 대단히 규칙적인 삶을 살아왔고 한번도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의사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며 즐기며 사세요’라고 말한다. 그가 그토록 아끼며 키워왔던 아들은 이미 그에게서 한참 멀어져 있다. 남겨진 시간은 길어야 1년. 무엇을 할 것인가?

 

 

 술을 마시지 않던 그는 술도 마시고, 도박장과 홍등가에도 가보고, 가라오케에서 “사랑스러운 아가씨, 인생은 짧으니 사랑에 빠지세요”라는 노래도 불러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를 느낀 그는 절망하면서도 죽기 전에 단 하나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가치 있었다는 증거가 될만한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하고 버려진 땅을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얼마 전에 시청에 찾아와 집 주위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여자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 그는 그 일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시민과’의 일이 아니라며 '토목과'로 보냈다. 민원인들은 공무원들이 이런 식으로 모두 자기 부서의 일이 아니라면서 핑퐁을 쳐서 토목과, 공원과, 보건소, 위생과, 환경과, 예방과, 충역과, 하수과, 도로과, 도시계획과, 소방서, 교육과, 시의회를 돌다가 다시 시민가로 가게 되자 격분하여 항의를 하고 갔던 것이다.

 그는 여자들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마지막 힘과 정성을 혼신을 다해 쏟아 붓는다. 드디어 공원 개원식 날, 그는 눈 내리는 공원 그네에 앉아 “사랑스러운 아가씨, 인생은 짧으니 사랑에 빠지세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얼어 죽는다. 그러나 다음날 신임 시민과장은 시민과를 찾은 민원인의 요구를 시민과의 일이 아니라며 토목과로 보낸다. 이전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말단 직원 한 명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과장에게 항의한다. 와다나베는 변화의 새로운 불씨를 남기고 떠나간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시청 안의 딱딱한 풍경과 밤거리의 화려한 볼거리들을 대비한 촬영, 일본의 옛 유행가(‘곤돌라의 노래’)와 미국 팝송(‘Too Young’, ‘Come on-A My House’) 등을 적절하게 사용한 음악도 인상적이며, 무엇보다 무기력한 공무원의 모습을 감동적일 만큼 현실적으로 보여 준 시무라 다카시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어두운 공원에서 홀로 그네를 타는 그의 모습은 결코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와타나베가 공원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의 장례식장에 참석한 술에 취한 동료들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씩 되살리는 장면이다. 그러면서 그들 동료 공무원들도 와다나베를 본받아 시민의 충복이 되기로 결심한다.  와다나베는 주변사람들에게 반성과 변화의 불씨를 남겼던 것이다. 어떻게 살면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