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이시영 (1949 ~ )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 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을 보고 걸었다
- 시집『滿月』창작과비평사 1976. 35쪽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원래는 시조를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시마다 운율이 살아 있어서 읽기가 참 좋습니다. 시인은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시적 감성을 새롭게 변용시켜 신선한 시각으로 절실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의 시는 1970년대에 나온 시이지만 지금 읽어도 절절한 느낌을 주는군요. '꿈'이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나는군요.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가쁜 숨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나라에 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공부 많이 한 학생이 되고 싶다고
칠 년이 지나도 그 말이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여공이셨다
('꿈' 전문)
시인의 시에서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경직화된 도식으로 파악하지 않는 1970년대 한국시의 감동적인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 앞이 막히면 또 한 잔 해야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올거라는 믿음을 갖고 이렇게 또 한 해를 맞이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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