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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서기원 단편소설 『이 성숙한 밤의 포옹』

by 언덕에서 2011. 4. 9.

 

 

 

 

서기원 단편소설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서기원(徐基源, 1930 ∼ 2005)의 단편소설로 1960년 [사상계]지 6월호에 발표되었다. 전후 황폐한 젊은이의 방황을 그린 작품이다. 1960년 제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1960년대까지의 서기원의 문학 경향은, 전쟁의 부조리한 상황, 가치관의 전복, 기존 질서의 파괴 등을 적나라하게 분석, 묘사함으로써 전후파의 기수가 되었다.

 날카로운 문체와 통찰력으로 상이군인, 제대병, 창녀 등 낙오자를 통해 현실을 투시한 그의 작품은,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은 무기력감을 안고 숨어 지내는 탈영병, 자살하고 싶어 하는 창녀 등의 낙오자들을 통해서 인간성 상실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전후 문학 작품이다. 이는 전쟁 상황 속의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간구하는 젊은이들의 삶과 고뇌를 다루었다. 그는 문학이란 세련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며, 그 세련된 언어로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학은 언어라는 '순수주의적 입장'과 문학은 현실표현이라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다 같이 수용하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런 문학관은 식민지 후기의 순수문학파의 문학론과 광복 후의 참여문학론을 다 같이 수용,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늙은 기관차는 유리창마다 성하지 못한 객차들을 폐물이 되어 버린 혁대처럼 주체스럽게 달고 고개를 기어 올라갔다.

 기관차를 타고 가다 굴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석탄 냄새와 M1 총의 화약 냄새를 혼동하게 되었다. 나는 연인인 상희가 폐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휴가증도 없이 탈영을 하였다. 탈영 도중에 만난 여인을 입막음하기 위해 죽이고 기차를 탄 것이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리자, 불현듯 산에서 내가 죽인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 올랐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과 상희의 얼굴이 한데 겹쳐서 확대되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얼마 동안 계속 기계적으로 걸어가다가 상희의 집을 향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의식적으로 상희의 집을 지나쳤다. 그 집이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서워서 나는 창녀촌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선구를 따라가 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선구는 남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빈 병에 오줌을 누는 습관을 가졌고, 룸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집에 창녀인 진숙이 다녀가면서 선구에게 동반 자살을 부탁하더라는 말을 했다. 선구는 자학적인 억지웃음을 짜내면서,

 “만일 갈보년하고 함께 자살했다고 하면, 남들이 비웃겠지?”

하고 물었다.

 나는 나른한 졸음이 몰려와 침대 위에 올랐다. 잠 속에서 전쟁을 회상한다. 나는 우리들 참호 밖에서 얼마 안 떨어진 소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죽은 시체들 위에 꽃송이라도 얹어주고 싶었으나, 소대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벽의 문에 걸린 누더기 같은 군복을 입으려 했다. 나의 무거운 군화는 휘청거리는 무릎에 매달려 간신히 끌리었다.

 상희야, 너한테 가서 내가 지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너의 뚫어진 허파에서 마지막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지만, 살아나게 되고, 애인인 상희를 찾아나선다.

 

서기원(徐基源,  1930 ∼ 2005 )

 

 이 작품은 전쟁 때문에 피해 받은 젊은이들의 윤리적 방황과 좌절, 애정 부재의 아프레게르적인 고뇌가 주제인 서기원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젊은이들의 황폐해진 생활과 의식세계를 보여준다. 도무지 삶의 목적과 의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는 주인공이 탈영병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더욱 고조된다. 직장이 있으나 무질서하고 방탕한 환경에서 안일한 룸펜생활을 영위하는 선구 또한 전쟁으로 인해서 삶의 건강한 의욕이 자라날 토양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대변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이 삶의 목적을 상실하여 죽음을 동경하고 자살충동을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본능인 성욕만은 꺾이지 않고 살아 있다. 불모의 땅이지만 뿌릴 씨가 건재한다는 것은 희망의 징조이다. 서기원의 역사 소설에로의 천착이 아프레게르적인 초기 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던 언어 인식의 강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도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50년대 작가군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여겨진다.

 

 

 서기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귀국해 광복 때까지 충청남도 홍성에서 살다가 광복과 동시에 서울로 이주해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0년 6ㆍ25전쟁 발발로 인해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9ㆍ28서울수복 후 공군 장교로 임관해 1955년 대위로 예편한 뒤,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후 계속 작품 활동을 하면서 1965년 서울신문 주일 특파원과 1970년 중앙일보 논설위원, 1973년 경제기획원 대변인, 1976년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1979년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1982년 서울신문 상임감사, 198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1988년 서울신문 사장 및 한국신문협회장, 1990년 KBS 사장, 1995년 96문학의 해 조직위원장,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거쳐 이듬해부터 1999년까지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 회장을 지냈다.초기에는 전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가치관의 혼란, 세태와 풍속 등을 주로 그렸는데,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근대 역사와 인물을 소재로 정치ㆍ사회의 변화상과 사회적 비리 등을 강하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