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주일학교 여선생님을 생각하며... 어빙 래퍼 작. <기적>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장미꽃이 만발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 성당 교리실에서 스무 명 가량의 남녀 아이들이 눈을 빤짝이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영화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덧니가 유달리 기억나는 선생님은 20대 중반의 키가 크고 글래머 몸매를 한 미인이었는데 항상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그날 성경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영화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셨다. 5분 정도 늦게 지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어있던 선생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선생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와 향수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자 형제 없이 자란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孟春,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도 있었으리라.
여름방학 때 우리 주일학교 6학년들은 선생님과 함께 부산의 가장 구석자리에 위치한 다대포 해수욕장에 놀러갔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귀가시간이 너무 늦어서 부모님들이 경찰서에 <아동 실종신고>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쨌든 그 리버럴하고 예뻤던 선생님은 그 일로 징계를 받았는지 그날 이후 주일학교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후임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간단하여 더이상의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갔다!"
선생님이 떠나고 난 후, 어린 마음에 가슴 한 가운데가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리땁던 선생님이 해주었던 영화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영화가 오늘 소개하는 <기적>이다.
<부산 서면성당의 성모상. 4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이 성모상 뒤의 교리실에서 이 영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영화는 1959년 어빙래퍼 감독이 연출했는데 남자 주인공은 '007'로 유명한 로저 무어, 여자 주인공은 영화 '자이언트'에서 루즈 베네딕트 2세를 맡았던 캐럴 베이커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백 년 전, 나폴레옹의 군사들은 스페인을 영국군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부대의 총대장 마이클(Capt. Michael Stuart: 로저 무어 분)은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인근 수녀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테레사(Teresa: 캐롤 베이커 분) 수녀는 마이클의 간호를 맡게 되고 마침내 둘은 사랑에 빠진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수녀로서의 금기사항을 어기며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그로 인해 갈등을 느낀다.
얼마 후 마이클은 완쾌되어 다시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떠나기 전날 테레사는 마음의 증표로 시계를 건네준다. 그러나 마이클이 떠나자 테레사는 그리움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수녀원을 빠져나와 마이클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테레사가 수녀원을 떠난 이후 수녀원에서는 성모상이 사라지고, 영화는 사라진 테레사를 대신하는 여인의 모습이 비추어 진다. 그리고 그 마을은 가뭄의 날들로 이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일어난다. 한편 수녀원을 빠져나온 테레사는 집시의 마을에서 자신이 증표로 준 시계를 발견하고 마이클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실의에 빠진 테레사는 집시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죽은 줄만 알았던 마이클은 극적으로 살아남아 수녀원으로 테레사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수녀원을 떠난 뒤였다.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여행하던 테레사는 스페인의 한 귀족 청년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투우경기 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그는 죽음을 당하고 그녀는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모두 죽는다는 과거의 악몽에 다시금 사로잡힌다.
집시가수로 유명해진 테레사는 부자귀족과 결혼을 앞두고 개선행진 중인 군대와 마주치는데, 거기서 마이클을 발견한다. 마이클을 만나 기뻐하면서도 그를 다시 사랑하면 그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마이클과 헤어지게 되고 그는 전쟁터로 떠난다. 테레사는 마이클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워털루전투에 참가한 마이클에게 포탄이 떨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마이클 부대의 사령관은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It's a Miracle" 이라고 감탄을 내뱉는다. 테레사가 수녀원으로 돌아오자 사라진 성모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두 세 번 본 것 같다. 어릴 때 이 영화를 본 느낌은 테레사의 용기나 사랑의 중요성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어 우연히 다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테레사가 사라지고 난 다음 사라진 성모상으로 초점이 바뀌었다. 성모상은 테레사 수녀로 변해 수도원의 테레사 수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테레사 수녀가 돌아왔을 때 사람이었던 성모마리상은 원래의 조각이 되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녀원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성모상에 놀랐고, 그 이후 비가 오지 않아 온 마을이 가뭄에 허덕일 때 빨리 사라진 성모상이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그가 테레사 수녀였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테레사 수녀가 비운 자리를 성모상이 인간화하여 메운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이탈하고 테레사 수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좇아갔다. 그녀는 “참 사랑을 자기 손에 꼭꼭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분에게 돌려 드리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면 위로부터 은총의 비가 내린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요즘 세대의 가치관으로는 그저그런 메시지겠지만 청소년 시절에는 상당히 의미있게 다가왔던 영화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앞뒤를 맞추어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원작자나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스토리를 쓰고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나의 과문함 탓으로 돌릴 일이겠지만 짐작으로는 누가복음 15:11~24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해당시대에 맞추어 극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는 탕자인 아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아버지는 따뜻한 마음으로 용서하며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이 영화의 메시지와 동일하다. 하느님을 대신하는 상징인 성모상이 테레사 수녀의 잘못을 탕자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수도자가 정결해야 할 계율을 어기고 여러 남자와 수많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며 살다가 돌아와서 다시 수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회계와 반성을 했으니 가능하다고? 실제로 그렇게 될까? ) 이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의견주시기 바란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 평등, 혁명 그리고 애절한 사랑이야기 <닥터 지바고> (0) | 2011.02.23 |
---|---|
윤종빈 졸업작품 - <용서받지 못한 자> (0) | 2011.02.21 |
비인간적인 도시화를 다룬 타이완 영화 <애정만세> (0) | 2011.02.14 |
1960년대 사실주의 한국영화의 최고봉 유현목 작. <오발탄> (0) | 2011.02.09 |
1960-70년대의 미국 - 로버트 지메키스 작. <포레스트 검프> (0) | 2011.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