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졸업작품 - <용서받지 못한 자>
수 년 전, 한 유명 가수의 병역 기피 의혹으로 세간이 시끌벅적하던 때가 있었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이 가수는 청소년 금연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며 공공연하게 자신의 군복무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 가수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군 면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국외로 추방되고 다시는 국내에서 연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장면, 2002년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던 한 후보는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그는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것은 물론 평소의 강직한 이미지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군대는 한 가수의 가수인생를 봉쇄할 수도,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파탄의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혹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군대 이야기는 이처럼 늘 우리사회에서는 태풍의 눈이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되면서부터 최고의 수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던 영화가 있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기대를 입증하듯 일찌감치 상영분 전체가 매진을 기록하였고 기대감에 부푼 관객들과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첫 공개를 하면서부터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뜨거운 호평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결과 관객들의 잔치인 부산영화제에서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PSB관객상을 비롯하여 뉴커런츠 특별언급,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넷팩상을 모두 휩쓸며 명실상부한 영화제 최고의 영화임을 증명했다.
이 영화의 성과가 더욱 놀라운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대학 영화과 4학년 학생의 졸업작품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중편 길이의 작품을 예상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윤종빈 감독은 꼭 해야 할 이야기를 다 마치고 보니 장편길이의 시나리오가 된 이 작품를 완성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독립영화제작지원금 1천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전에 찍은 단편 <남성의 증명>으로 미장센 단편영화제로부터 받은 상금 500만원과 사재 500만원을 어렵사리 마련해 결국 2천만원을 가지고 120분짜리 장편을 완성하였다.
이 영화는 '군대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군대는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경험과 이야기의 소재로서 존재한다. 일반화된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고 치부되어 사회적 묵인에 이른, 혹은 의도적으로 가벼운 잡담이 되어버린 그 기억의 결기를 있는 그대로 되살려놓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년여 동안 나름 군기반장으로서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말년 육군병장 태정(하정우)은 중학교 동창인 승영(서장원)이 내무반 신참으로 들어오면서 평탄치가 않게 된다. 상관의 군화에 매일같이 물광을 내 갖다 바치는 것이 당연하고 고참은 신참 팬티를 뺏어 입어도 당당할 수 있는 군대 특유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승영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태정은 친구라는 이유로 승영을 계속 감싸주지만 자신까지 곤란한 상황에 몰리기가 일쑤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는 태정의 충고와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승영은 자신이 고참이 되면 이런 나쁜 관행들을 다 바꿀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태정에겐 자신의 제대 후 홀로 남겨질 친구의 앞날이 걱정될 뿐이다.
그러던 중 시간이 흘러 상병이 된 승영도 어느덧 이병 지훈(윤종빈)을 후임으로 두게 된다. (감독이 직접 '지훈'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고참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승영은 자신의 소신대로 지훈에게 잘 해주지만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부대 내 따돌림은 심해진다. 인간적으로 대한 지훈도 승영의 바람과는 달리 부대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문관"이 되어간다. 고참들의 괴롭힘 속에 태정이라는 보호막도 없어진 승영은 이제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라면이 먹고 싶다는 후임병을 위해 한밤 중에 라면을 끓여주고, 물통을 대신 들어주기도 하던 그였다. 자신이 고참이 되면 모든 것을 바꿔버리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그조차도 결국은 후임병 지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당사자가 되고 만다. 믿었던 승영에게 폭력을 당한 후임병 지훈은 부대내 화장실에서 구두끈으로 목을 매고 자살하여 생을 마감한다.
1년여 후, 제대하여 군대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태정에게 어느날 상병으로 복무 중인 승영으로부터 갑작스레 만나자는 전화가 온다. 승영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태정은 여자친구를 불러내고 승영은 어딘가 불안한 모습으로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자꾸 태정을 붙잡는다. 여관에서 태정에게 현실의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하소연하던 승영은 태정이 냉랭하게 대하며 나무라며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여관 내 욕실에서 동맥을 칼로 자르고 자살한다.
이 영화는 막 제대한 이에게는 잊고 싶었던 군 생활의 상처를, 조금 시간이 지났다 싶은 사람에게는 타협하며 맞춰야 살 수 있는 정글과 같은 현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부당한 일들이 당연시되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까라면 까야' 하고, 얻어맞고도 웃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군대에선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군대, 학교, 유치장처럼 억압적인 규율로 꽉 막힌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나름의 적응력으로 생존해 간다. 그리고 그 집단이 ‘정상적인’ 무리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복합적인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이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한번쯤 겪어보면 나쁘지 않은 곳’으로 회자되곤 하던 군대를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사람들의 시선으로 구성한 진짜 군대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27회 청룡영화상, 5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42회 백상예술대상, 10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FIPRECI)(윤종빈),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윤종빈), PSB 관객상(윤종빈)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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