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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 제임스 아이보리 작. <남아있는 나날>

by 언덕에서 2011. 3. 9.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 제임스 아이보리 작. <남아있는 나날>

 

 

 

오랜만에 만난 이 레스토랑은

고운 비단 실은 낙타가 지나간 사막 같으오

한시절 우리가 엮은 비단은

기억 속에서 펄럭이고 밤이 오는 사막을

술로 적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어 있다니

여전히 당신 손가락은 백합 같으오

해질녘이면 몰려오는 백합 냄새로 괴로웠소

어제 [남아 있는 나날]이란 영활 보았소

사람들이 밤에 불을 켤 때

최고의 시간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항상 환호를 한다는 말이 생각나오

 

나의 나무에 환한 등불이 열린

잊을 수 없는 한시간 반이었소

은은히 빛나는 당신 머리색이 아프오

그만 일어설 시간이 다가오오

 

신현림 시인의 시 '남아 있는 시간'에서 언급된 영화이다.  사람들이 밤에 불을 켤 때 최고의 시간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항상 환호를 한다...

 일본의 작가 카주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오랫동안 달링턴 홀이라는 시골 저택에서 집사로 일 해온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 분)가 수석 가정부(가정부 관리자)였던 미스 캔튼(엠마 톰슨 분)을 찾아 길을 떠나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58년, 스티븐스(Stevens: 안소니 홉킨스 분)는 영국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며 그는 1930년대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 그리고 주인 달링턴 경(Lord Darlington: 제임스 폭스 분)을 위해 일해 왔던 지난날을 회고해본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었다. 스티븐스는 주인인 달링턴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친 나치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스티븐슨은 자신의 맹목적인 충직과 직업의식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매력적인 켄튼(Miss Kenton: 엠마 톰슨 분)의 사랑을 일부러 무시했고, 그 결과 몇 년 동안 켄튼과 스티븐스의 관계는 경직되어왔다.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애모의 정을 감춘 채 스티븐스는 오로지 임무에만 충실해온 것이다. 결국 그의 태도에 실망한 그녀는 그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았다.

 

 

 

 

 

 스티븐스의 집안은 대대로 집사 가문인데, 그의 인생목표는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기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그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갔던 것이다. 당시 새로 들어온 가정부 책임자 미스 캔튼은 스티븐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인간성을 찾아주려 노력하지만 스티븐스는 이러한 감정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스티븐슨은 저녁 만찬 시중을 드느라 위층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착하지만 세상일에는 문외한인 주인이 나치주의자들에 현혹되어 반역자명단에까지 오르는 정치적 재난과 함께 미스 켄튼은 달링턴 저택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가 섬겼던 주인마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스티븐스에게 한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미스 켄튼의 편지에 스티븐스는 20여년을 억눌러왔던,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감정을 되살려내며 부푼 희망의 여행길에 오른다.

 지금 스티븐스는 결혼에 실패한 켄튼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녀를 설득시켜 지난날 감정을 바로잡아 잃어버린 젊은 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마저 무산되고 그는 새로운 주인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되찾게 된 달링턴 성으로 혼자서 외로이 돌아온다. 그는 지난날의 온갖 영욕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남은 달링턴성은 어쩌면 자신과 조국 영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영국인으로 오해를 받을 만큼 꼭 다문 입술과 여성들의 욕구를 억압하는 듯한 코르셋 등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줄기차게 만들어왔다. 1994년 제작한 <남아있는 나날> 역시 그의 이러한 취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에서 호흡을 맞췄던 아이보리 감독과 제작자 이스마엘 머천트, 각본의 루스 프라우어 자발라 3인방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남아있는 나날"은 영국을 배경으로 전통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억누르는 사회의 모습을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다. 거대한 저택과 함께 아카데미 수상에 빛나는 정상급 연기자들의 열연,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는 격동기의 한 시대상이 장면 뒤에 펼쳐져 영화의 품위를 더해주고 있다.

 이 영화는 영국인들이 아직도 자랑하고 있는 전통과 예절, 충성심에 대한 품격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93 골든글로브 5개부문(작품.감독.여우주연(엠마 톰슨).남우주연(안소니 홉킨스).각본상) 노미네이트, '93 아카데미 8개부문(작품.남우주연.여우주연.감독.미술.의상.각색.음악상) 노미네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