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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단편소설『익명의 섬』

by 언덕에서 2010. 9. 17.

 

이문열 단편소설『익명의 섬』 

  

 

이문열(李文烈. 1948~ )의 단편소설로 1982년 3월 [세계의 문학]에 발표되었다. 『익명의 섬』은 친인척으로만 이뤄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동네 아낙들과 덜 떨어진 듯한 남자 깨칠이의 은밀한 관계를 다룬 소설이다. 동네 사람과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유일한 남자인 깨칠이는 아낙들 대부분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아낙들의 비밀을 지켜주는 깨칠이와 ‘익명의 섬’인 깨칠이를 통해 억눌린 성을 분출하는 아낙들에 대한 내용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소외와 익명의 기능을 환기한다. 1980년대의 산물로서 단편소설 『익명의 섬』은 하나로 고정된 1980년대를 해체하고 복수의 1980년대를 그려 보임으로써 작가 이문열이 지각한 80년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동족 부락의 일례를 통해서 고립된 개인 사회에서는 더욱더 익명의 섬이 많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필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가 익명의 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익명성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러잖아도 도회 문화는 익명의 외로움이 겨울 낙엽보다 더 쓸쓸하고 처량하게 보이는 세태다. 도시의 익명성은 범죄를 촉발하는 주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영악한 익명의 시대’란 말도 그래서 나온다. 도시 환경은 필연적으로 익명의 타인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게도 한다.

 이 작품은 1983년 안성기와 정윤희가 주연으로 임권택에 의해 <안개 마을>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 <안개마을>, 198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은 TV를 보다가 우리 사회가 너무 쉽게 익명화될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도덕적 타락, 특히 여자들의 성적 타락을 개탄하며 어린 시절의 '동족 마을'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섬광처럼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부임한 어느 시골 국민학교의 동족 마을에서의 일이었다. 그 마을에는 '깨철'이라는 떠돌이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묵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주도 이집 저집 어느 곳이든지 다니면서 해결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깨철'의 존재를 끊임없이 관찰하던 나는 여름방학 중 알게 된 지금의 남편과 열애를 하던 동안에는 '깨철'이란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철이'가 느닷없는 충격으로 나를 겁탈했다. 당시 남편은 군에 있었다. 나는 남편이 휴가 나오기만 기다렸으나 남편은 아파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 남자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던 날, 억제된 성과 허탈감으로 집으로 오던 중 소나기를 피하려고 길가 어느 집 창고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깨철이'가 나를 범했다. 그래서 '강간'이라기보다는 '화간'으로 판단된다. 그때 '깨철이'는 여자들이 언제 자기를 원하는지를 안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그동안 숨겨져 있던 동네의 아낙들과 '깨철이'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 동족 마을의 폐쇄성이 가져다주는 여자들의 성적 불만은 익명의 사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이 '깨철'이라는 사내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묵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후, 같이 근무하는 남자 교원에게 그동안 관찰해 온 '깨철이'란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교원도 '깨철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마을의 남자들 역시 동족들 사이에서의 체면을 위해서 또, 익명의 사내 '깨철이'의 뒤끝 없음을 믿고 그를 묵인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이 마을을 떠나던 날, 정류소로 나오던 나는 '깨철이'를 만나게 된다. 나의 후임으로 오는 여자 교원에게 '깨철이'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고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그것은 그도 언젠가 '깨철이'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설가 이문열( 李文烈.  1948~ )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과 '깨철이'의 사이에도 룰이라는 것이 적용되었다. '젊은 남자의 아내는 피할 것', '나이 든 남편의 아내라도 되풀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 등이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이 지켜지지 않을 시에는 룰에 적용되어 그녀들의 남편들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악마적인 침입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불안을 즐기는 일종의 피학대 성향이나, 자신들의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도덕과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깨철이'와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지는 보상심리를 즐기고 있다는 해석을 내린 주인공의 생각처럼 '깨철'은 폐쇄된 마을 사람들의 폐쇄된 성적 타락의 탈출구인 셈이다.

 누구나 자신의 내부엔 성적인 요인 말고도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주변 환경에 스스로는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며 분출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에게도 '깨철이'와 같은 익명성이 존재해 준다면 과연 누가 그 욕망의 분출을 억누르고 있기만 할 것인가? 이 작품 『익명의 섬』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명의 섬이 많아지고 있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또, 그것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인데 사회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익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깨철’은 마을의 여자들과 거의 관계를 맺었고,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은 죄다 안다. 그런데도 ‘깨철’은 끄떡없이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마을은 평온을 유지한다. ‘깨철’ 스스로 익명 속에 숨어 있고,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익명의 섬’으로 묵인받기 때문이다.

 

 

 

 『익명의 섬』이란 말은 오래전에 읽은 소설의 제목이지만 요즘 많이 상기되는 말이다. 현시대는 인터넷 시대이고 익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학자가 말했다. " 모든 자동차에 운전자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달게 하면 교통사고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현시대에 익명의 힘은 강력하다. 익명의 힘이 주는 것의 첫 번째는 책임감을 피할 수 있다는 거다. 두 번째는 죄책감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그 외에 일방성, 도피성, 은둔성, 일회성 등등의 편리함과 자유를 안겨준다. 『익명의 섬』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명의 섬이 많아지고 있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또, 그것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대도시에서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도 익명투성이다. 이는 각박한 사회 현실이라는 익명이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익명 자체에 대한 신뢰 때문에 묵인하게 된다.

 현대인은 태양의 서커스 ‘퀴담’이 풍류 하듯 길모퉁이를 서성대다 총총히 사라지는 ‘익명의 행인’인지도 모른다.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명의 공간이 급증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각박한 사회의 익명이 도덕적인 타락을 초래함에도 우리는 익명 자체에 대한 막연한 믿음 때문에 묵인하기도 한다. 익명성은 이처럼 무섭고도 흥미롭다.

 

 

 

 


 

☞ 영화 <안개마을>  이 소설 『익명의 섬』은 1983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안개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나름의 작품성을 인정받아 1987년 인도 등지에 수출된 적이 있다. 영화를 본 기억으로는 안성기(깨철)와 정윤희(주인공; 국민학교 여교사)가 주연했는데, 여배우의 평소 이미지가 백치미 캐릭터여서 소설의 진지함을 반으로 줄여버렸던, 그래서 캐스팅에 의문이 갔던 작품이다. 혈연과 지연의 끈이 붕괴되고, 그것에 의한 통제력이 사라지는 현대사회에서 ‘익명의 섬’은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익명은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데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의 무리 속에 있어도 익명성이 생긴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르봉(G. Lebon)은 후자(後者)의 익명성에 의한 충동적, 비정상적 행동을 ‘군중심리’로 설명했다. 쉽게 비유하면, 번듯한 신사복을 입고 한껏 품위를 지키던 남자들이 흔히 예비군 동원훈련에만 가면 돌변하는 것도 획일한 제복의 익명성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