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韓江, 1970~ )의 장편소설로 2010년에 출간되었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깊이 있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상처, 슬픔 그리고 기억을 탐구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고통과 치유의 여정을 담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단짝 친구 이정희와 서인주는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어느 겨울, 폭설 속 미시령 고개에서 서인주가 돌연한 죽음을 맞는다. 이정희는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이정희는 서인주와 외삼촌의 그림과 자료가 남겨진 작업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사진 한 장과 그 뒤에 적힌 암호 같은 메모에 의지해 상담소 소장 류인섭의 존재를 알게 된다. 정희는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한 젊은 여성 화가의 죽음을 신화화하고자 하는 미술평론가 강석원과 대립하며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저 짙은 어둠 속에서 폭발하는 별들이 한데 용솟음치는 혼돈 속에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수소문하는 저자는 미세한 숨결로 생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주인공 이정희는 강렬한 삶에의 의지 하나로 바닥을 기어 화염 속을 뚫고 힘겹게 생의 틈을 좇아 나아가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집요한 ‘탐정’이 이끄는 미스터리이자 두 여자가 나눈 사랑의 역사를 담았으며 독자의 내면을 향해 던지는 저자의 질문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정희와 서인주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수유리의 친구이다. 서인주는 단거리 육상 선수로 활동하며, 병약한 외삼촌 이동주와 단둘이 살고 있다. 외삼촌 이동주는 우주의 비밀과 과학적 탐문에 깊은 관심을 가진 예술가로, 먹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정희는 서인주의 집에서 우연히 외삼촌의 작업을 관찰하게 되며, 별과 우주, 생의 기원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고, 외삼촌과 애틋한 사랑도 키워간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이동주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서인주는 장대높이뛰기 중 크게 다치어 육상을 그만둔다. 이후 서인주는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하며 시간이 지나 이정희에게 연락한다. 인주는 정선규라는 남자를 만나 아들 민서를 낳지만, 이혼 후 힘든 생활을 이어가게 되고, 외삼촌의 기억에 얽매여 피폐한 삶을 산다. 이정희 역시 K라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겪는다. 세 번의 임신 중절을 경험한 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인공호흡기를 쓰고도 숨을 토해낼 정도로 삶을 열망하게 된다.
이후 이정희는 인주와 민서와 아프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돌연 서인주의 소식이 끊긴다. 이어서 겨울의 폭설 속에서 미시령 고개의 자동차 사고로 인주가 사망한다. 이정희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며 외삼촌의 죽음과 친구의 잠적이 얽힌 복잡한 감정에 시달린다.
이정희는 인주가 자살이 아니었다고 믿으며 강석원이 인주의 죽음을 신화화하려는 시도에 맞선다. 그녀는 인주의 그림과 자료가 남겨진 작업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사진과 암호 같은 메모를 통해 상담소 소장 류인섭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찾아 나선다. 류인섭은 과거 인주의 모친 이동선과의 비밀스러운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류인섭은 과거 인주 어머니와 사랑했던 남자로, 인주가 죽기 전까지 겪었던 고통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인주가 자신의 엄마의 죽음과 외삼촌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아픔이 그녀의 삶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음을 설명한다.
이정희는 류인섭의 이야기와 함께 인주가 남긴 메모와 그림을 분석하면서 인주가 폭설 속에서 왜 미시령으로 향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님을 증명할 단서를 찾아낸다. 그녀는 인주가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통해 인주가 그린 먹그림이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메시지임을 이해한다.
이정희는 강석원의 평전 작업이 인주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임을 알게 되며, 강석원과의 대립이 격화된다. 그녀는 강석원의 책 출간을 저지하기 위해 공적인 공간에서 인주에 대한 전시회를 열게된다. 이 자리에서 인주의 작품과 그녀가 겪은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인주가 스스로 생을 포기할 수 없는 인물이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또한 그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내며, 그녀의 삶과 작품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데 헌신한다.
이처럼 이정희는 인주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그녀의 삶을 다시금 조명하는 데 힘쓰며, 인주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진실을 탐구하며 친구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이정희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정희와 인주의 상처는 그들이 겪은 개인적 경험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역사적 상처와도 연결된다. 특히 인주는 시위에서 다친 뒤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고 이는 한국 사회가 겪은 폭력과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 인물이 고통 속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상처받은 이들이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삶을 회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며,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상처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가 겪은 고통과 억압을 반영한다. 인주의 부상은 그 시기의 학생 운동과 폭력적인 탄압을 상징하며, 이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비추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 억압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이 작품에서 기억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희와 인주는 각자의 과거를 기억하며, 그 기억 속에서 상처를 되새기고 치유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정희는 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깊은 상실감을 안고 있으며 그 기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인주 역시 시위 중 입은 상처를 기억하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기억은 고통스럽지만 그 기억을 통해 결국 상처를 치유할 가능성을 찾아 나간다.
♣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바람'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오는 자연의 힘으로, 때로는 치유의 가능성을 상징하며, 때로는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정희와 인주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시간과 사건들을 기억 속에서 다시 되짚으며 그 속에서 자기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바람은 변화와 치유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로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의 문체는 마치 시처럼 아름답고도 슬픔이 가득한 언어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작품의 주제와 잘 어우러진다. 인물들의 감정과 고통 그리고 상처받은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하면서도 독자에게는 그들의 치유 가능성을 암시하는 여지를 남긴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개인과 사회가 겪는 고통과 상처 그리고 그 속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배경으로 하여 작가는 상처받은 인간들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정희와 인주의 여정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자 상실과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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