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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성석제 단편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by 언덕에서 2010. 5. 21.

 

 

성석제 단편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成碩濟,1960 ~ )의 단편소설집으로 2014년 출간되었다. 단편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가 표제작이다. 작가는 흥겨운 입심과 날렵한 필치, 정교한 구성으로 '성석제식 문체'를 전개한다. 이 단편집에는 세상의 공식적인 길에서 한 치 비껴난 예외적인 인물들의 생에 주목함으로써 기성의 통념과 가치를 뒤집는다.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티브면에서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연상시킨다. 이 소설 외에 한 친목계 모임에서 우연히 벌어진 조직폭력배들과의 한판 싸움을 그린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잘살아보려던 한 입주과외 대학생이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을 그린 <욕탕의 여인들>, 세상의 경계선상을 떠도는 괴이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책>, <천애윤락>, <천하제일 남가이> 등 일곱 편의 중 ·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집은 예외 없이 세상의 통념과 질서를 향해 작가 특유의 유쾌한 비수를 날리는데, 비극과 희극, 해학과 풍자가 난무한다.

 작가는 현실에 널린 대상을 포착해 그것을 묘사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성석제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목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분해한 뒤 거대한 거짓말의 세계로 끌어들여 정교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소설문법을 유쾌하게 뒤집어 보이고 있다.

 

소설가 성석제(1960~)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단편이다. 남의 비웃음과 모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자신의 일을 다 하며 이웃을 돌보다 갑작스런 사고사를 당한 황만근의 일생이 뼈대이다. 바보 황만근은 그의 진면모를 알아본 한 외지인의 기림 속에 온전히 살아난다. 그러면 황만근은 과연 무엇이라 말했는가? 그는 작중 어디에서도 아무 특별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지만("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카이"가 그나마 제대로 된 발언이다) 그 때문에 말없이 도리를 다한 생애는 욕망과 이기심으로 뭉친 삶을 되비추는 독특한 거울이 된다. 

 2. 천애윤락

 천애윤락(天涯淪落)은 중국의 시인 백난천의 <비파행>에 나오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앞뒤 문맥을 고려해서 해석하자면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정도일 것이다.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잘살아보려다가 헤어지고 돈 많은 아가씨 만나 잘 살아보려다가 이별하고, 그도 저도 안돼 입사한 기업의 사장비서와 뭔가 꿈꾸려다 부서지고…….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들을 해학과 풍자로 엮은 <천애윤락>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나온다. 친구라는 관계로 설정되어있는 동환, 기옥, 문학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를 도출해 내기는 어렵다. 세 명의 친구와 외로움, 소외를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석제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고정관념을 탈피한 반어적인 표현이 아닐까 한다. 친구라는 관계에 있음에도 외로운 사람들. 그것이 더욱 슬픈 모습으로 비치던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3.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한 친목계 모임에서 우연히 벌어진 조직폭력배들과의 한판 싸움을 그린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은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해학과 야유가 전편에 깔린 작품이다. 사기, 간통 등의 소소한 전과를 가진 지역사회의 보잘것없는 일원들의 모임인 이 '상호친목계'(한번 계원이 되면 '상호간에 평생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는 계'의 준말이다)는 그대로 현실세계의 축도이다. 이들의 크고 작은 이권 싸움과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파렴치하고 비겁한 이력은 그 자체로 흥미롭게 부조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작품의 끝부분에 돌연 등장한 '진짜 깡패'들과의 일전은 이 세계가 '진짜 이전투구'의 장임을 생동감 있게 폭로하는 장치이다. 이 "지리멸렬의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의 몰 합리적이고 폭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속성"(정호웅)과 그에 대한 맹목적 복종, 한여름 땡볕 속에 벌어진 이유 없고 우연한 싸움의 아수라를 아연한 활기와 환호성으로 버무려 그려낸 작가의 솜씨가 빛을 발한다. 

 4. 책

 책에 대한 소유욕인지 정말 책을 사랑하는지 습관이 돼버린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삿짐센터에 월 15만원씩을 맡기면서까지 책을 사 모으는 당숙과 그의 보관을 담당하는 조카가 등장인물이다. 책을 옮기느라 난리법석을 피우는 한 편의 풍자극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참 동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5. 천하제일 남가이

 한 나그네가 친구를 찾아가다 들른 술집에서 술 한 잔 건네며 들은 남가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그네의 입을 빌려 쓴 글이다.

 아주 비천한 처녀의 몸을 빌려 태몽도 요란하게 태어난 남가이. 그는 커나가면서부터 오묘한 분위기와 빼어난 용모, 뭔가 집어낼 수 없는 향기와 냄새 등 특이한 사람이다.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모두가 이성을 잃고 그에게 넋을 놓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 낸다거나 제어 못하는 행동을 자유롭게 못한다거나 아주 흉측하게 변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일을 만들게 된다. 이런 그를 알아본 군 관계자는 그를 대상으로 인종개량을 목표로 시도 한다. 유전자를 채취한다거나 여자를 만나게 해 2세를 만들어 실험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탈출한다. 그리곤 결혼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6. 욕탕의 여인들

 '목욕하는 여인(들)' '바느질하는 여인' '파라솔을 쓴 소녀' 등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소제목으로 삼은 특이한 구성을 취한 「욕탕의 여인들」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잘살아보려던 한 입주과외 대학생이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을 그린다. 얄팍한 욕심과 변변치 못한 이력의 소유자가 미모의 돈 많은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해보려다 '주제를 파악하고' 안착하는 과정이 주인공의 허위의식과 적당한 순정주의를 기조로 경쾌하게 이어진다.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얄팍한 계산속과 이기주의가 막강한 현실과 부딪혀 낳는 결과를 해학과 페이소스에 실어 보여줌으로써 한편으로는 개인을 얽어매는 이 세계의 완강한 질서를, 한편으로는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낸다. 

 7. 꽃의 피, 피의 꽃

 도박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국 "첫 판은 무조건 승리한다"는 룰과 신념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닌 특이한 사람이 등장한다. 결국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만큼 큰 힘을 지니는가를 역설한다.

 

「목욕하는 여인들」, 1887년, 캔버스에 유채, 118×170,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이 책과 비슷한 제목의 철학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신이 죽어버린 이 시대를 지배할 사람들은 누구보다 똑똑하고 누구보다 강한 초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제 세상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아서 피곤한 시대'가 되었다. 젊은이 중에 누구에게 '순수', '순결'의 가치를 말하면 뭔가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로 각인될까 무섭고, 어르신들 앞에서 '돈 될 만한'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 받기가 십상이다.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행복해졌는가?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남을 잘 속이고 남을 잘 짓밟는 사람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세상에서 다시 한 번 황만근 식의 삶의 방식이 그리워진다.

 이 소설집에서는 세상의 경계선상을 떠오는 '괴(怪)'한 인물들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집의 부피를 초과할 만큼 책 수집에 탐닉해온 <책>의 주인공 당숙, 온갖 불운의 한가운데만을 걸으면서도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천애윤락>의 동환, 천덕꾸러기로 태어난 천하제일의 미남으로 자라고 향기로써 보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는 <천하제일 남가이>의 반평생, 첫판의 도박은 종류를 불문하고 이기고 마는 <꽃의 피, 피의 꽃>의 주인공 '나'가 그런 이들이다. 이들이 가진 독특한 습성과 괴벽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들은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법한 개연성을 부여받아 생동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편으로 설화적 · 전기적 요소를 십분 활용하는 치밀한 구성과, 대상과 상황의 미묘한 기미를 놓침 없이 날렵하게 짚어내는 문장들에 힘입은 것이다. 

 

 

 사회의 물욕화 과정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식되는 현대 속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현실에 무감각한 `책`의 당숙처럼 때론 한 곳에 열정을 두어 그것에 매진하는 한 인간의 순수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꽃의 피, 피의 꽃`에서처럼 타락한 인간을 내세워, 오히려 한 인간의 순수성 회복 과정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철저하게 무의미한 삶이다. 속수무책으로 엉뚱하고 정다운 사람들이다. 증명할 길 없고 정교하고 무용한, 그러나 한사코 믿고 싶은 박학다식이다. 그 모든 것이 못 말리게 흥겨운 입심의 에너지에 실려 폭죽처럼 펑펑 터지며 정처없이 흘러가는 길이다. 그 길가에는 새싹처럼 움찔움찔 낯익은 말들이 낯선 방식으로 돋아나 쑥쑥 자란다. 춤추듯이 가지를 뻗어 길을 덮는다. 길은 대책없이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그러면 마침내 그 길은 무엇에 이르는가? 철저하게 무용한 정열인 삶을 한바탕 신명나게 읽고 난 기쁨, 혹은 슬픔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성석제의 소설은 그의 문체처럼 때론 짧고 빠르게 현대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일침이 아닐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헤치기보다는 인간이란 존재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