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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

by 언덕에서 2010. 8. 9.

 

이문열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 

 

이문열(李文烈. 1948∼)의 장편소설로 1980년 9월 [문예중앙]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도 시시덕거리며 썼다고 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을 만큼 코미디의 희극적 즐거움을 갖추고 있다. 독자에 따라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보다 몇 배는 더 웃기는 소설이지만 마냥 즐거운 얘기는 아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 소설을 '이문열의 가장 중요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와 현대 사회에 대한 이문열의 시각과 비판이 시간 순서대로 빠짐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 씨의 500년500 왕업이 쓰러진 뒤, 하늘이 내린 800년 운수를 받들어 계룡산 아래 신도내에 개국한 '조선국 태조 광덕대비 백성제'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이다. 잡지사 기자인 화자는 계룡산 취재 중 제사를 지내는 한 무리를 만났다. 그 가운데 묘를 지키는 능참봉이 그들의 실록을 보여준다. 그 실록엔 황제의 행적이 실려있는데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는 몇 년 후 기억을 되살려 다시 쓴 실록이다. 소설 속 주인공 '황제'는 등극할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믿고 일제 강점기의 만주와 한국 전쟁의 격전지를 누빈다.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황제와 황제 추종자들의 시각으로 실록 특유의 고색창연한 문체로 다시 정리한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 우리 생각이 가진 모순들에 대해 때로는 희화적으로 때로는 냉정하게 파헤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 (李文烈 .1948 ∼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잡지사 기자인 화자가 '신역 정감록'이라는 책을 받아 든 뒤, 새로운 기사거리를 만들기 위해 취재차 계룡산으로 간다. 여기서 우발산이라는 노인을 만나 '백제실록'이라는 책을 보게 되고,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뒤 잡지사를 그만두고 나서 노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황제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록을 찾을 수 없어 옛날에 본 기억을 더듬어 연의 형식을 빌어 이 글을 쓰게 된다.

 황제는 1895년 정 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천명을 받은 사람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을 옛 성현의 글에 따라 익히며 자란다. 황제 역시 정감록에 나오는 정진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이 씨 왕조가 망하게 되면 정 씨 왕조가 열린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이조 말년의 어지러운 세태를 겪고 황제는 여기저기서 흘러 온 사람들에 의해 받들어진다.

 험난함이 연속인 과정을 지나고 정감록의 예언에 따라 모든 일정을 행하지만, 결국 황제는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1972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서야 자신이 꿈속에서 헤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황제를 위하여』는 장자의 무위를 이상으로 하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전통에 대한 작가의 회귀 의식과 거부 의식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즉, 황제라는 인물을 통하여 깨끗한 삶을 요구함으로써 깨끗한 삶을 인간의 진실된 덕목으로 취급하지만, 불합리하고 모순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 현실의 땅에 환상의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돈키호테이다.   그가 얼마만큼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황제를 위하여에서 뛰어나게 흥미로운 부분들, 예를 들어, 기차를 처음 봤을 때의 그의 반응, 주막에서 돈을 털릴 때의 그의 유장함, 그리고 '바가야로' 사건, 젊은 대위 사건 등에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만의 비정상적인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미숙아, 우발산, 방량, 신기죽, 두충, 변박유‥‥‥등은 범법자, 사기꾼, 몽상가, 반편, 알코올 중독자, 미치광이 등이다. 황제와 그의 보조자들은 현실 내의 뿌리박은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변두리를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들이다. 그들이 현실과 부딪칠 때, 그들은 현실적인 척도에서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그들은 더 굳건한 환상의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환상의 나라의 맨 윗자리에 황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비현실적인 사람이지만, 그 마음만은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 깨끗함과 거룩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문열은 그 거룩함과 깨끗함의 근거로서, 과학의 합리를 미신이라고 믿고, 초자연적 직관을 논리라고 믿는 그의 마음을 지적하고, 그 실천의 논리로, 제왕의 도와 노장의 무위를 들고 있다. 거룩함과 깨끗함은 비세속적인, 성스러운 것에 속한다. 그 성스러움은 합리주의자들의 과학이나 합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느낌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은 아니다. 그 성스러움을 보장하는 것이 초자연적 직관이며, 그 직관은 성스러운 물건, , 사람들의 예언의 틀 안에서의 직관이다. 예측가능성이 과학이라면 그 직관 역시 과학이다. 그 과학은 실험보다는 의례를 존중하는 과학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국보급으로 불리는 이문열의 문장이다. 그의 소설 <사육제>에서처럼 문체가 간결하고 빠르며 유장하다. 이것은 한문 실록 등을 서술할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장엄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문체는 비사실이란 문제의 차원에 적합한 서술 스타일이다. 그는 이러한 스타일의 문장을 통하여 매우 숙련된 작품을 이끌어 내는 스타일리스트 작가다.

 황제의 그 도저한 정신주의를, 『황제를 위하여』의 화자는, 처음에는 일견 황당무계하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모든 정신적 체제를 부정하는 정신적 힘으로 긍정한다. 화자 역시 황제의 정신주의에 은연중에 감염된 셈이며, 그 감염이 그로 하여금 황제의 일생을 재구성하게 만든다. 황제의 정신주의에 화자가 공명하기에 이르는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그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