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장편소설『경마장 가는 길』
소설가 하일지(1955 ~ )의 장편소설로 1990년 발표한 등단작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문단에 상당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이 소설이 내용과 기법의 다양성 때문만이 아니라 정통적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한 독자층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이해 보이면서도, 내부로 들어갈수록 주도면밀한 구조와 테크닉으로 짜여진, 기괴한 동굴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도덕’이나 ‘사랑’으로 맺어진 것처럼 위장된 인간 사이의 관계의 실체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R의 절망이 곧 우리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형용사와 은유를 철저히 배격해 나간 이 소설의 묘사는 몸서리쳐질 만큼 치밀하고 집요하다. 그 지독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R은 귀국하자마자 그와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동거했던 J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그다지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다. R과 J는 처음부터 어떤 불화가 시작되는데, 그 불화를 묻어 둔 채 R은 대구에 있는 그의 집으로 내려간다. 대구에서 R은 늙은 부모와 가족들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주어진 열악한 현실과 마주친다. 그러나 R은 그 현실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 R은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아내와 이혼하려고 하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한편, 서울에 있는 J라는 여자와의 사이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R은 끝내 한국이라는 모순 덩어리의 현실을 떠나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고 자신의 계획을 J에게 제의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 윤리관을 지닌 J는 결국 R을 배반한다.
R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자신이 구상한 글을 쓰기 위해 집을 떠난다. 막내 동생에게만 알리고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탄다. 버스 안에서 R은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R은 광주에서 내려 충장로에 들렀다가 승주 선암사로 간다. 선암사를 한 바퀴 돌아나와 다시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순천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져 거기서 짐을 푼다. 다음날 R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가방을 메고 여관을 나와 벌교로 갔다. 그리고 장흥으로, 다시 어느 작은 읍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어느 조그만 암자로 가서 지낸다.
R은 다음날 진주에 도착해 어느 여관에서 자고 지리산 내원사로 간다.
이『경마장 가는 길』은 주인공 R이 두꺼운 공책을 꺼내어 급한 손길로 다음의 글을 써 내려 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2월 16일, K가 돌아왔다. 어쩌면 2월 15일, 또는 17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왔기 때문에 막상 도착했을 때 그는 곧 시간의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도착하면 몇 월 며칠 몇 시가 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미리 충분히 계산해 두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20여 시간의 비행기 여행 동안 줄곧 심한 두통과 불면,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느라고 그런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그에게 주어졌다. 여기까지 단숨에 써내려 간 R은 공책 위 삼 센티 정도의 여백에다 좀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경마장 가는 길’”
하일지 소설에 내재된 공통분모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 '경마장에서 생긴 일'은 '경마장 가는 길', '경마장은 네거리에서', '경마장을 위하여', '경마장의 오리나무'의 후속 편이자 경마장 표제 소설의 완결편이다. 작가는 일련의 경마장 표제 소설을 연작이나 시리즈로 불려지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경마장 시절'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보이는 다소 엉뚱하고 생소한 경마장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는 "경마장이란 말은 상징적 의미체계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설 창작의 기능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가 스스로에게 경마장이란 소설적 상상의 공간이며, 독자에게 경마장이란 하일지의 소설세계에 접근하는 일종의 코드 역할을 한다. 하일지의 경마장 시절 소설의 세례를 받은 독자들은, 경마장 하면 과천이나 뚝섬을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R이나 K, 혹은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떠올린다. 그것이 경마장이란 말이 가지는 전략적인 의도이다.
♣
'경마장에서 생긴 일'의 주인공은 중학교 물상 교사인 K다. 그는 사단 법인 한국교사 휴양원이라는 단체의 초청을 받아 한 섬에 가게 된다. 그는 관광호텔같이 생긴 흰 집으로 안내되어 907호실을 배정 받는다. 그 방은 추웠고 청소도 안된 상태며 게다가 위층에서 땅땅땅 하는 소음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는 이러한 불편을 개선해 달라고 계속 요구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 K는 한국 교사 휴양원이 실체가 없는 유령단체임을 서서히 알아차린다. 약속된 요양기간이 지나도 K는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귀환은 섬을 통제하고 경영하는 상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단식 등으로 상무에게 항거를 시도하지만 모든 것은 무위로 끝난다. 그에게 남은 것은 타의적 삶뿐이다.
그의 또 다른 소설(경마장 표제 소설이 아닌) '새' 또한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친 자아를 그리고 있다. 소설 내용보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부를만한 형식실험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16년간 다닌 증권회사에서 퇴출당한 A이다. 그는 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까마귀처럼 생긴 크고 검은 새'와 부딪친 후 길을 잃고, 남천이란 가상의 고향에서 실력자의 아들로 살아가고, 지하철역 노숙자가 되고, 까마귀처럼 검고 큰 새가 된다.
그 과정에서 부모가 바뀌고, 아내와 정부와 정부의 친구가 뒤죽박죽이 되고, A는 뭐가 뭔지 헷갈리게 된다. A는 왜소해진 현대인, 구체적으로는 IMF 실직자. 그가 가상의 고향에서 겪은 상류층 경험은 소시민의 잠재 욕망을 나타낸다. 그러나 꿈은 상상 속에만 이루어진다. A는 다시 우울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실직자의 뒤를 쫓는 새가 되는 것. 가족에게서도 외면당한 A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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