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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제임스 조이스 장편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by 언덕에서 2017. 1. 6.

 

 

제임스 조이스 장편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1882∼1941)의 장편소설로 1914∼1916년 [에고이스트(Egoist)]지(誌)에 연재된 내용을 1916년 간행하였다. 자전적인 요소가 있으나 단순한 자전소설은 아니며, 5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장마다 문체가 조금씩 달라진다. '의식의 흐름’의 수법을 쓴 심리묘사가 작품 전체를 일관하고,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가톨릭교회와의 결별과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재질 발견을 주제로, 유년기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자아형성을 부드럽고 섬세하게 묘사하였는데 첫머리의 유년기의 회상은 특히 신선감을 준다. 제5장에서는 조국과 종교와 가정을 부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T.아퀴나스식 예술론이 대화 가운데 펼쳐진다. '예술의 신'에 대한 호소는 아일랜드 민족을 그대로 인류에 직결시켜보려는 과감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 뒤에 나온 역작 <율리시스>의 전초적 역할을 하였다.

 주인공 스티븐 디딜러스의 유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성장을 그린 교양소설로 특히 그 중에서도 예술가의 성장 과정을 그린 예술가 소설이다. 한편 스티븐은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자신을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자전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의 서술은 주인공의 자아상 탐색과 정신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제임스 조이스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또 미래를 위해 자신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을 묶고 있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장기를 보내는 스티븐을 통해,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스티븐 디돌러스는 엄격한 제수이트파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키가 작고 눈이 나쁜데다가 어느 한구석 내놓을 만한 곳이 없어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안경이 깨졌기 때문에 라틴어 시간에 수업을 받을 수 없게 된 스티븐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노트 필기를 하지 않았다. 때마침 교육 감독으로 들어온 드란 신부가 전후 사정 얘기를 할 새도 없이 채찍으로 혹독하게 때렸다. 교장에게 이르라는 급우들의 충동질과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린 스티븐은 교장에게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그는 이 일로 해서 급우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스티븐은 크론고즈 칼리지를 중퇴하고 다시 벨베디아 칼리지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그는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오만함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어느 날 그의 뛰어난 작문을 읽은 교사의 ‘이 학생의 작문에는 이단 사상이 있다’는 말로 인해 급우들과 테니슨보다는 바이런이 더 위대한 시인이라고 다투기도 한다. 스티븐은 때마침 받은 장학금으로 집안에 보태고, 남은 돈으로 사창가를 찾아가 매춘부와 잠을 잔다. 동정을 상실한 그는 뉘우침과 함께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때 학교에서는 묵상 기간이 계속되었고, 죄악과 지옥에 대한 신부의 설교를 들은 스티븐은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여 죄씻음을 받고는 금욕생활에 들어간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를 섭렵하며, 종교적인 단련과 예술가로서의 소양을 쌓아나갔다.

 소년기를 벗어나 성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던 어느 날, 스티븐은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를 보고는 영감을 받아 자신의 천직을 자각한 뒤, 신앙의 길을 떠나 예술의 신에게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친구인 크랑거에게, “이제는 내가 믿지 않는 것은 그게 가정이건, 조국이건, 교회이건 무엇이든지 섬기지 않겠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자유롭게, 가능한 한 전적으로 어떤 생활, 혹은 예술의 양식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네.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 스스로 사용하기를 허용한 유일한 무기, 즉 침술과 추방과 교지(狡智)를 쓸 작정이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양가치는 무엇일까?

 첫째는 그가 여러모로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점이었으며 21세기에도 각광받는 현대고전작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의 위상이다.

 둘째는 그의 책이 그가 성취한 인간탐구가 유례없이 풍부하고 진솔하며 철저하면서도 문제의식이 강해 매우 각별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단련시킨 자전적 상상력이 도시와 시민, 언어와 의식, 역사-신화-정치 등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도시 더블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셋째는 그 체험내용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다분히 친숙한 주제와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도 한국처럼 한때 이웃나라에 종속되는 비슷한 처지의 식민지 약소국의 갈등을 겪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처럼 남의 사정을 내 일인 것처럼 몰입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서구 소설문학에 새 지평을 연 작품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진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스토리나 플롯을 끄집어내기가 힘들다. 그만큼 인물이나 사건, 연월일 따위의 외면적 설명이 생략되고, 상징화되어 극도의 압축과 집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주인공 스티븐이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종교, 조국, 가정 등 자아 속에 감추어진 이러한 굴레를 어떠한 계기로 어떻게 벗어나 예술가로서의 자각을 하게 되는가를 의식의 변화에 초점에 맞추어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테마와 방법은 그의 최대 걸작인 <율리시즈>에 보다 확충되어 나타난다. 

 이 작품은 또한 실험적인 기법의 사용, 감각적 현실 파악 방식으로 인해 서구 모더니즘 사상을 대변하고 현대 소설의 형식적 전통을 선도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다. 특히 이 소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형상 완벽한 3인칭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이 본격적으로 구사될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 도처에서 스티븐의 의식 세계는 이 현대적 기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뒤이어 나온 조이스의 문제작『율리시스』속에서 본격적으로 구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