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을 위한 연가
김승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하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으로 불리는 김승희 시인(1952 ~ )은 동시대의 다른 여성 시인들과 달리 사변적 시나 페미니즘적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이상의 시 <절벽>을 읽고 ‘인간이라는 모순과 인생이라는 절망을 자기 언어로 노래한다’는 것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상과 니체의 실존적 고뇌에 대해 철학적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현실과 문명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 시를 썼으며, 제도와 인습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시적 아이러니를 통해 ‘당연과 물론의 세계’를 거부하는 진지한 인간성 해방을 쓰고있다.
시인을 시를 자세히 읽다보면 뜻밖의 낱말, 엉뚱한 표현, 당돌하고 거침없는 비유, 상상치 못했던 형상들을 통해 ‘꿈을 찾기 위한 현실과 절망에 도전’하는 여성 전사와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인은 TV의 교양프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날카로운 현실 분석은 놀랍도록 예리하다. 1994년 이후 발표된 소설도 이러한 시적 경향을 산문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것일 것이다. 또한, 주술적인 운율과 초현실주의적인 상상을 결합하면서 폐허 속에 빠진 인간 세상의 종말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1987년 펴낸 위의 시<미완성을 위한 연가>는 이전의 주관적 경향에서 벗어나 객관적 거리를 두고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인생의 가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맺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이별을 하고 그리워하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일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고 대부분은 인간관계의 진행에 불과하다. 정치라고 하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인간관계의 테이블을 큰 판으로 늘여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중요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연속인 삶 속에서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시는 그것을 진지하게 묻고 있다.
그 시작은 우선 슬픔이다.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연옥이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되며,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잘라서 말하고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이다. 연옥은 가톨릭 교회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곳을 말한다. 불로써 단련받는 천국처럼 황홀하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지옥처럼 처참하고 고통만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다. 마음의 아픔을 잊지 못해 서로 고통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에 연옥은 시인에게 가혹하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이 되는 것이다.
4연으로 구성된 위의 시는 1연에서 슬픔이 아름다움의 밑거름으로 나타났고, 2연에서는 어둠 속을 헤매며 스치는 인연사가 나온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의 밀알이 썩음으로써 새의 비상이 생기는 것처럼 희망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3연에서 창조의 힘을 발휘한다. 쳐다보는 마음은 나무를, 별빛을 만든다. 상황을 거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헤어지게 된다. 그러한 헤어짐의 슬픔이 4연에서 곱게 승화되고 있다. 헤어지면서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된다. 그러한 때에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연옥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은 헤어짐과 이별을 감내하고 살면서 스친 인연들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시이다. 인생의 흐름에 대한 핵심을 설파하는 가볍지 않은 시이다. 인간의 삶이 왜 미완성인지 생각을 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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