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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낙엽론 / 허만하

by 언덕에서 2009. 11. 12.

 

 

낙엽론

 

                                                   허만하  

 

 

고독의 부둣가에서

그치지 않고 불어오는 식민(植民)의 바람을 맞으며

소금에 저린 손으로

포도송이처럼 알진 포말을 문지르고 있었다.

난리에 시달려 풍화한 저 얼굴들을

왜 어제까지도 다정하던 저 시가(市街)의 황혼을

무너진 현실의 오브제를

나는 보이지 않는 철조망 너머로만 바라봐야 하는가

산의 요부(腰部)

그리고 노을에 물든 수평(水平)

가령 스피노자가 닦던 고독한 렌즈

아니면 문득 눈에 스며드는 저 오랑캐꽃

이런 아름다운 것들이 원경(遠景)으로 용암(溶暗)하고

투명하게 자라온 시야를 횡으로 절단하는

왜 초점은 이 가시넝쿨에만 멎는가

역사의 손이 뿌린 씨앗이라 하자

퉁구스의 대륙에 매달린 시든 유방(乳房)같은 나라라 하자.

식민의 거름 속에 떨어진 혜지(慧智)라 하자.

왜 자학(自虐)의 술잔을 들이키면서

두 대전(大戰) 사이

바람이 때리치는 음참(陰慘)한 회의(懷疑)의 계곡을

나의 시(詩)의 낙엽들은 일산(逸散)해 갔던가.

마지막 잎사귀처럼 매달려 떨던 여정을 위해

파토스의 무구(無垢)를 지키기 위해서도

나는 왜 이 사랑하는 이데아의 파편들을

목쉰 갈매기의 절규같이 격(激)한 바람에

한 잎, 두 잎 결별(訣別)해야 했던가.

 

 

 - 시집 <해조海藻>(1969)

 

 

 

 

 

 

 

 

 

 

 

 

 

 

 

허만하 시인(1932 ~ )은 대구출생으로 의사생활을 하면서 시를 써왔다. 동족상잔의 6.25의 비극을 겪으면서 젊은 시인은 시를 쓸 무렵, 그 당시의 나라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암울한 상황에 좌절하면서 시의 감성을 위해선 사랑했던 이데아를 버려야하는 현실의 억압 구조에 절망과 비판의 태도를 갖고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서정적인 이 시는 6·25 전쟁이라는 현실 상황이 준 회의와 절망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다.

 

 고독의 부두는 실제의 부두일 것이다. 일제가 남겨놓은 식민의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오는 상황을 상징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치지 않고 불어오는 식민(植民)의 바람을 맞으며 소금에 절인 손으로 포도송이처럼 알진 포말을 문지르고 있다. 난리에 시달려 지친 얼굴들과 우울한 그림자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의 목표를 절망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자아를 단절하는 벽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투명한 예지의 이성 세계, 시적 감성 세계와 같은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 버렸고 철조망의 가지 매듭에 좌절되어져 간다. 역사의 손이 뿌린 씨앗이라고 체념을 해도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에 매달린 작은 나라인 나의 조국은 황폐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가 지혜 있는 민족이라는 것에 위로를 할 수 밖에 없다. 화자는 2차대전과 6·25 전쟁을 상기하면서 민족 수난의 현실에서 지식인의 회의와 고난이 준 상처가 큰 것에 대하여 자학하고 있다. '바람이 때리 치는 음참(陰慘)한 회의(懷疑)의 계곡을 나의 시(詩)의 낙엽들은 일산(逸散)해 갔던가'라고 표현하며 현실 상황에 대해 비관하고 회의하며 절망하고 있다. 화자는 파토스의 무구(無垢)를 지키기 위해서 즉, 시적 감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중요시 하는 이성(이데아의 파편)을 버려야 하는 현실의 억압구조에 절망과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신문에서 노 시인의 동정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바위를 보면 인간의 절멸을 기다리는 듯한 어떤 적의를 느낀다.'고 했다. 지층은 그 적의의 바위처럼 이미 절멸을 품은 채 또 다른 절멸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는 '고유한 목숨의 꿈'이 길에서 크게 짓밟힌 경험이 있다. 그는 6·25 때 군번 없는 신분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짐승처럼 비루하고 처참한 목숨의 실상을 낱낱이 보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고교 2학년이던 그는 집으로 돌아가던 대구의 한 길에서 느닷없이 학도병으로 전장에 끌려갔다. 두려움에 휩싸여 평북 태천까지 갔다가 후퇴하는 1년여의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 자신의 소중한 일회성을 깨달았고, 그것은 고유한 나 자신의 언어 찾기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시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그는 '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보다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의 문제, 즉 방법이 모두이다'라고 지적하며 '시어는 날카로운 칼자국이 패여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고신대 의대 교수(병리학)로 있다 정년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