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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 빗소리 / 박화목

by 언덕에서 2009. 11. 9.

 

 

 

 

가을 빗소리

 

                               박화목

 

간 밤에

찾아 올 사람 없는 나의 객창(客窓)에

누가 몰래 와서 자꾸만 두드리더니

 

흐느끼듯 기타의 외로운

가락을 울려 들려주더니

 

밤 새 담쟁이 가랑잎들이

비(悲)에 홈빡 젖어, 이 아침

이별을 결심하고 찾아온

마지막 시간의 그 여인처럼

아무 말이 없다.

 

비는 그쳤어도 피부 속 스며드는

싸늘한 한기(寒氣), 가슴 속에도 병든

가랑잎들이 이리저리 구을르고 쫓기다가

담장 밑이나 그런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들 있을 테지.

 

잠시나마 종말(終末)의 화사한 볕이

그들의 못다한 생명의 보람을

쓰담는가 했는데, 아

 

조국의 자랑이라는 가을 하늘이 다시

흐리어, 창 밖에 가을 빗소리…….

 

이 마음 하염없이 얼룩이 진다

낙엽이 쌓인다.

 

 

- 시집 <천사(天使)와의 씨름>(한국문화사 1975)

 

 

 

 

 

 

 

 

 

 

 

 

박화목 시인(1924 ~ 2005)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과 동심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려냈으며 가곡 <보리밭>과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1924년 2월 15일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와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를 거쳐, 한신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41년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그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과 동심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30대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박화목 '지음, 옮김, 번역, 엮음' 등의 동화책 / 위인전을 단 한 권이라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57년 첫 시집 <초롱불>을 출간한 이래 <시인과 산양(山羊)>(1958),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1960), <꽃 이파리가 된 나비>(1972), <천사와의 씨름>(1975), <이 사람을 보라>(1986), <순례자의 기도>(1989) 등 모두 16권 시집ㆍ동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밖에 저서 <아동문학개론>(1995)을 비롯해, 수필집 <보리밭>, <그 추억의 길목에서>, 동화집 <아기별과 개똥벌레>, <인형의 눈물> 등을 남겼다. 2005년 7월 9일 숨을 거둘 때까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들었다. 필자의 손위 동서와 절친한 친구 분이 있는데 부인이 박화목 시인의 따님이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언덕 위에 하얀집을 갖고 있는 내외는 무척이나 배려깊고 지적인 분들인데 따님을 보면서 아버님이신 박화목 시인이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았다.

 

 위의 시를 보도록 하자. 50살이 넘은 중년의 시인이 바라본 가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에는 가을이 왔으나 시의 화자에게는 찾아올 누군가가 없다. 그래서 외롭고 슬픈 그에게 비[雨]는 비(悲)와 같다. 그의 객창(客窓)에는 밤새 가을비가 내린다. 외로운 그 창의 주인은 그 소리를 누군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로, 누군가가 울리는 기타의 슬픈 가락으로 들었다. 비에 젖은 담쟁이 잎들은 말없이 창밖에 색 바랜 채 있는데 시의 화자는 그것이 `이별을 결심하고 찾아온 마지막 시간의 그 여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쓸쓸한 가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상 때문일 것이다.

 

 봄부터 생명의 기운을 내뿜던 나뭇잎들은 가을을 맞이하여 그 한살이의 마감을 준비한다. 가을의 햇빛은 스산하고도 맑아서, 시의 화자는 그것을 `종말의 화사한 볕'이라고 처연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때론 비가 내리기도 해 일찍 바랜 힘없는 잎사귀들을 떨어지게 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시간, 끝을 맞이하는 불가항력의 시간에, 시인은 상심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이렇게 아래로 떨어져 낮아지는 계절에는 상심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시인은 가을을 보았고, 비를 보았고, 바랜 잎들을 보았고, 맑디맑은 가을 하늘'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가을비는 내리고 마음 깊은 곳에 하염없이 얼룩이 지고 낙엽이 쌓여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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