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가을 빗소리 / 박화목(朴和穆)

by 언덕에서 2009. 11. 9.

 

 

 

가을 빗소리

                                                                              박화목(朴和穆.19242005)

 

간 밤에

찾아 올 사람 없는 나의 객창(客窓)에

누가 몰래 와서 자꾸만 두드리더니

흐느끼듯 기타의 외로운

가락을 울려 들려주더니

밤 새 담쟁이 가랑잎들이

비(悲)에 홈빡 젖어, 이 아침

이별을 결심하고 찾아온

마지막 시간의 그 여인처럼

아무 말이 없다.

비는 그쳤어도 피부 속 스며드는

싸늘한 한기(寒氣), 가슴 속에도 병든

가랑잎들이 이리저리 구을르고 쫓기다가

담장 밑이나 그런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들 있을 테지.

잠시나마 종말(終末)의 화사한 볕이

그들의 못다한 생명의 보람을

쓰담는가 했는데, 아

조국의 자랑이라는 가을 하늘이 다시

흐리어, 창 밖에 가을 빗소리…….

이 마음 하염없이 얼룩이 진다

낙엽이 쌓인다.

 

- 시집 <천사(天使)와의 씨름>(한국문화사 1975)

 


 

 박화목 시인(1924~2005)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과 동심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려냈으며 가곡 <보리밭>과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위의 시는 50살이 넘은 중년의 시인이 바라본 가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에는 가을이 왔으나 시의 화자에게는 찾아올 누군가가 없다. 그래서 외롭고 슬픈 그에게 비[雨]는 비(悲)와 같다. 그의 객창(客窓)에는 밤새 가을비가 내린다. 외로운 그 창의 주인은 그 소리를 누군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로, 누군가가 울리는 기타의 슬픈 가락으로 들었다. 비에 젖은 담쟁이 잎들은 말없이 창밖에 색 바랜 채 있는데 시의 화자는 그것이 `이별을 결심하고 찾아온 마지막 시간의 그 여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쓸쓸한 가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상 때문일 것이다.

 봄부터 생명의 기운을 내뿜던 나뭇잎들은 가을을 맞이하여 그 한살이의 마감을 준비한다. 가을의 햇빛은 스산하고도 맑아서, 시의 화자는 그것을 `종말의 화사한 볕'이라고 처연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때론 비가 내리기도 해서, 일찍 바란 힘없는 잎사귀들을 떨어지게 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시간, 끝을 맞이하는 불가항력의 시간에, 시인은 상심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이렇게 아래로 떨어져 낮아지는 계절에는 상심하여 침묵하고 있다. 어쨌든 시인은 가을을 보았고, 비를 보았고, 바랜 잎들을 보았고, 맑디맑은 가을 하늘'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가을비는 내리고 마음 깊은 곳에 하염없이 얼룩이 지고 낙엽이 쌓여 간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골짜기 / 조향미  (0) 2009.11.11
미완성을 위한 연가 / 김승희  (0) 2009.11.10
소금인형 / 류시화  (0) 2009.11.07
엽서 두 장 / 이유경  (0) 2009.11.06
어떤 개인 날 / 노향림  (0) 2009.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