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골짜기
조향미(趙香美, 1954~ )
가슴 수북이 가랑잎 쌓이고
며칠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 둔 씨앗 몇 개의 화두(話頭)
푹푹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 깊이 어두워지리
- 시집 <새의 마음> (내일을 여는 책 2000)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저편의 심연을 응시하고 삶-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고독하지만 깊고 차분한 목소리의 시를 읽는다. 위의 시에서는 움직이는 대상을 한순간 정지시켜 고요 속에 천천히 가라앉는 존재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시인의 모습과 절제의 미덕을 엿볼 수가 있다. 대상의 내면은 시인의 내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들의 음조는 자연의 전이를 관조하는 부분은 옛 시들을 닮았다. 그러나 음조만 그럴 뿐, 모든 것들의 내부에 가라앉은 불멸의 결정체를 쓰다듬는 시의 손길은 명료하면서도 적막하고, 또한 신비롭다.
이러한 겨울 골짜기의 고요 속에서 화자가 꿈꾸는 것은 생에 대한 관조와 예지일 것이다. 침묵 속에서 움터 나온 말, 적막과 고요의 공간에서 단련되는 말이라면 곧 삶의 예지와도 같은 그 어떤 궁극적인 것일 듯하다. 말이 없음에 대한 열망, 침묵이나 적멸이나 죽음에 대한 열망은 요컨대 가식 없는 참된 말, 그러한 말 같은 말에 대한 열망이며, 말의 부활에 대한 열망인 셈이다.그렇다면 화자가 그려낸 저 자연 풍광 속의 죽음과 허무주의의 의미는 분명하게 드러난다.언어도단의 세계, 자연과 죽음의 세계, 폐허와 유적의 세계는 우리 삶의 일상성 일부분이다.죽음이 스쳐 가는 인간의 유한한 삶과 그를 둘러싼 자연의 표정을 포착해냄으로써 저절로 겨울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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