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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엽서 두 장 / 이유경

by 언덕에서 2009. 11. 6.

 

 

 

엽서 두 장

 

                                                             이유경

 

하얀 대낮에도 비 내리고 무지개 섭디다

숲 위에 선 무지개는 완벽한 반원에서 무너지고

대서양 쪽에서 꺼먼 구름이 악마처럼 몰려오는 게 보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루가 지곤 하였지요.

쪼그만 불씨를 돌려 만찬을 초라하게 차려 먹고

다 저문 밤에 빗질하고 있읍니다 그대 보이나요?

 

2

빛을 머금고 반사하는 예수 초상화 하나 샀지요

침묵의 바다 밑에 가라앉아 그와 나는 늘 마주서고

무료하게 서로 바라보다가 내가 먼저 외면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과 번개 잠들면 또 악몽이겠네

예수 초상은 언제나 한쪽만 보면서 빛을 머금고

기다려라 기다려라 합니다 그대 들리나요?

 

 

- 시집 <초락도(草落島)> (문학세계사 1983)

 

 

 

 

 

 

 

 

 

 

 

 

 

이유경 시인(1940 ~ )은 다양한 제재를 소화하여 해학ㆍ풍자를 곁들인 현실 의식과, 특히 현대에 있어서 이상과 자아의 갈등에서 오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고뇌를 즐겨 표현하고 있다. 이유경 (李裕憬) 시인은 여성적인 예쁜 이름을 가졌지만 여류시인이 아니다. 비슷한 경우는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이다. 위의 시집 초락도(草落島)의 저자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시(詩)를 쓴다는 일에 점점 외로움을 느낀다. 남의 시(詩)들을 읽어가노라면 더욱 그렇다. 좁고도 얄팍한 생각들과 타성에 빠진 언어로 적당하게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해 놓은 시들을 읽고, 그런 것을 모아 시집으로 묶어 놓은 것을 읽으면 시는 왜 써야 하는가? 따위의 의문도 갖는다. 사람들이 시를 읽고 삶의 뜻을,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자각 때문에 나는 더욱 시 쓰기가 어려운가 보다.'

 

 먹물냄새 풀풀 풍기는 표현이겠지만 시(詩)는 자아와 세계, 또는 본래적 자아와 일상적 자아의 교섭에서 탄생된다고 한다. 이 때 그 양자간에 동일성이 확보되면 시는 행복한 노래가 되고, 동일성이 상실될 때는 갈등, 대립, 소외, 고립 등 비극적 양상을 띠게 된다. 그의 시세계는 이와 같은 이른바 동일성 이론으로 조명하면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시집 <초락도>에서 나오는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길이나 바른 행선지로 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두운 늪에 빠져버린 발걸음, 염전에 괴인 바닷물, 인적도 불빛도 없는 어둠이 드러내듯 화자를 둘러싼 외부환경은 불투명하고 사물의 윤곽이 어둠에 감추어진 채 흐릿하고 모호하다. 막막한 어둠만이 가득한 길, 음습한 습기와 소금을 머금은 길은 지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막막하고 어두운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위의 시는 화자가 '그대'라고 지칭하는 지인(또는 가상의 연인)에게 보낸 두 장의 엽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적인 섬세하고 고운 표현이 돋보이나 이것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첫 번째 엽서는 대낮에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하여서 하루가 저물고 그런 상태에서 초라하게 저녁을 먹은 후 하루를 정리하는 외로운 남자의 단아한 모습을 지인에게 알리고 있다.

 두 번째 엽서는 빛을 머금고 반사하는 금박 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를 구입하여 바라보다가 외면하곤 하는 화자의 구도적인 내면 심리가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고통스러울수록 인내를 해야 한다는 처연하고 경건한 심경을 지인에게 호소하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중년의 세대들이 사용했던 '엽서'를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것 같다. 수학여행 가서 구입했던 명승지의 그림엽서, 외국간 친지가 선물로 주었던 남국의 사진이 담긴 엽서, 이중섭의 그림이 담긴 그림엽서, 음악 신청하러 남몰래 라디오 방송국에 보냈던 빛바랜 엽서……. 그 많던 엽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찌하여 컴퓨터 키보드와 이메일 계정만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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