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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성동 장편소설 『만다라(曼陀羅)』

by 언덕에서 2009. 10. 30.

 

 

김성동 장편소설 『만다라(曼陀羅)』

 

    

김성동(金聖東, 1947~  )의 장편소설로 1978년 「한국문학」에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장편으로 개작해 출간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

 김성동은 6ㆍ25전쟁 때 아버지와 큰삼촌은 우익에게, 외삼촌은 좌익에게 처형당하면서 가정이 파탄지경에 이르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맹자>를 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좌제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를 그만둔 뒤 도봉산 천축사로 출가해 '무(無)'자 화두를 붙잡고 6년 동안 선방과 토굴을 오가며 지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다시 지효선사 문하로 들어가 계속 공부에 정진하였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자 이후 방랑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75년 첫 단편소설 <목탁조>가 [주간종교]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는데, 이때 소설의 내용을 문제 삼은 종단에서 등록하지도 않은 승적을 박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한국기원의 월간지 [기계(棋界)] 편집부 등 출판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던 중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중편소설 『만다라』가 당선되었다.

 『만다라』는 청소년기에 불가에 몸담은 젊은 수도승이 도를 얻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와 방황 그리고 진정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그린 불교소설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함께 1970년대 말 종교를 소재로 한 한국문학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만다라』는 인간의 구원과 수도승의 성불에 관한 문제를 종교적 색채와 배경으로 그려낸 방황과 혼돈의 기록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법운의 아버지는 6.25 때 공산주의자로 처형당한다.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법운의 어머니는 밤마다 녹의 홍상 곱게 차려 입고 들리지도 않는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찾아 헤매다가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여 가출해 버린다.

 법운은 그런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어머니 가출 후, 종조모 집에 잠시 의탁하고 있던 그는 종조모댁 산장에 요양 중인 지암 스님을 만난다. 지암 스님의 설법이 계기가 되어 입산 수도의 길을 택하여 출가한다.

 출가 후, 6년 동안 법운은 견성 성불의 원을 이루기 위해 기를 쓰고 도를 닦는다. 그러나 오묘한 화두의 비밀은 좀체 풀릴 줄을 모른다. 그는 그 비밀을 바랑에 담아 짊어지고 바람처럼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르게 된 벽운사에서 지산을 만나게 된다. 지산은 가승(假僧), 잡승(雜僧)으로 자처하면서 기괴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자칭 땡땡이 중이었다. 그는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었다.

 그의 성장 과정 역시 법운만큼 기구했다. 누구든지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교리에 우연히 접했을 때, 지산은 출가했다. 그후, 지산은 입산하여 은죽사 선방에서 피나게 공부했다. 뭔가 손에 잡힐 것도 같았다. 결제 해제도 없이 뿌리를 뽑고 말겠다는 각오로 수도에 임했다. 지산이 참구하던 공안(話頭)은 무(無)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답답해서 석간수를 마시러 나왔던 지산은 그가 끝내 극복하지 못한 허무와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해 버리게 된다. 문제는 여자였다. 그때 물 마시러 나다가 우연히 딱 한번 눈길이 마주친 여인으로 인하여 지산은 이제까지 정진하고 참구했던 ‘無’자 대신 '여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여러 가지 오해를 받게 된다. 여대생 강간범이 되고 만 것이다.

 처음에는 파계승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산 곁에 머물던 법운은 점차 그에게로 경사되어 갔다. 그래서 두 사람은 벽운사를 떠나서도 철저한 일숙주의자가 되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지산은 고독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종교 체제와 공리적인 민간 불교 신앙에 오염된 사찰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었다. 즉, 고독이나 허무에 철저해질 수 없는 나약한 수도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인간적일 만큼 수도에만 전념해야 하는 데도 법운과 지산은 그렇지가 못했다. 법운의 이상은 지산처럼 '대승 세계를 살고 있는 자유인' 혹은 '번뇌 즉 보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만 지산처럼 대담한 파계도 하지 못했다.

 법운과 지산은 오대산 산록에 있는 암자에서 거처를 정했다. 지산은 법운과 함께 암자 아래 술집에서 만취한 채 돌아오다가 산중에서 동사하고 말았다. 결국 지산은 너무도 인간적인 욕망과 허무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법운도 지산처럼 자살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지산처럼 '진실로 자기의 삶을 투철하게 사랑했어야 명분이 서는 것'임을 깨닫고 그만둔다. 법운은 자신의 수도가 피안에 도달하는 데만 급급한 쪽이었다는 것을 뉘우치게 된다. 자신의 피안 보다는 먼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법운은 여자와 동침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거리의 인파 속으로 뛰어든다.

 

 

영화 <만다라>, 1981

 

 저자가 20대 젊은 날에 겪은 삶에 대한 번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기록이면서, 당시 산업화의 병폐가 나타나고 있던 한국사회와 속세의 가치를 탐했던 불교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내용들을 모른다고 해서 작품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다라』는 불교라는 상자 안에 인생의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이며 맹목적으로 불교의 교리가 주입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다라』는 작품에 사용된 불교용어들을 접어두고 읽더라도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입산으로부터 10년간의 승려생활, 그리고 환속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은 장편 <만다라>에서 그는 거의 노골적으로 자기를 내보이고 있다. 참된 성불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이름도 없고,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 시공이 끊어진 절대의 그 자리를 한 손에 거머쥐는 것이라면 그것은 갈비와 갈비가 맞부딪치는’, ‘저 더럽고 냄새나는 저자의 뒷골목을 버리고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만다라』에서 작가는 이러한 질문으로 계속되는 방황과 혼돈의 기록을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섬세하고 잘 짜여진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정도의 투박함이 그러나 실은 그의 저력인지도 모른다. 

 

 

 불법을 지키는 것이 수도가 아니라, 인간 세상과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수도와 성불이 이루어짐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삶의 허위성을 사회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깊이 천착하고 있는 불교 소설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구원과 수도승의 성불에 관한 문제를 종교적 색채와 배경으로 그려낸 방황과 혼돈의 기록이다. 주인공 '법운'이 입산하기 전에 겪었던 현실적 고통이 처형된 아버지의 신음과 어머니의 가슴앓이에서 비롯한 비명으로 상징화되어 주인공의 의식을 괴롭히지만, 이 작품의 핵심문제는 개인적 해탈과 대승적 해탈 사이의 갈등이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운 땅을 여의고는 어디서도 깨끗한 땅을 찾을 길이 없다"는 인식을 얻게 된다. 불법을 지키는 것이 수도가 아니라, 인간 세상과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수도와 성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삶의 허위성을 종교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천착하고 있는 불교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