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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한수산 장편소설 『부초(浮草)』

by 언덕에서 2009. 11. 3.

 

한수산 장편소설 『부초(浮草)』

 

 

한수산(韓水山, 1946 ~ )의 장편소설로 1976년 [세계의 문학]에 발표되었으며, 1977년 제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곡예단 사람들의 삶을 그린 이야기다. 작가 한수산이 직접 곡예단과 생활하면서 작품의 리얼리티를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월곡예단'이라는 떠돌이 서커스 단원들의 뿌리 뽑힌 삶을 그린 이 작품으로 인해 한수산은 1970년대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수산은 1981년 [중앙일보] 연재 장편 <욕망의 거리>의 몇몇 표현이 당시 권부의 비위를 거슬려 시인 박정만씨 및 신문사 관계자들과 함께 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불리는 그 한을 삭이지 못하고 88년 일본으로 떠났다. 1997년 이후 세종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영화 [부초] 포스터, 1978 제작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월 곡예단'의 곡예 행진은 꽃소식을 따라 봄이면 낙동강 줄기가 시작되는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늦은 가을이면 지리산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들의 여로는 철새의 생리를 닮아 있다. 서커스단의 이러한 긴 이동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지방 흥행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천막이 펄럭이는 겨울의 객석에서 구경을 하겠다는 사람이 도회지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월 곡예단'을 이끌고 평생을 마술사로 살아온 윤재를 비롯한 단원들은 볼이 아프게 찬 새벽 바람을 맞으며 수원에 내렸다. 그리고는 해장국집으로 몰려가 몸을 녹이고 주인공 하명은 덕보와 함께 콧물을 흘려가며 해장국을 먹는다.

 윤재는 평생을 곡마단을 떠돌아다니며 혈혈단신으로 지내온 늙은 곡예사이다. 그는 단원들에게 정신적인 어른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하명도 윤재를 아버지 이상으로 생각해 왔으며 윤재 또한 아들처럼 그를 아껴 왔다. 따라서 하명은 서커스 곡예에 대한 예인으로서 살아온 윤재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한다.

 하명은 서커스단의 금기로 되어 있는 단원간의 남녀간 사랑에도 불구하고 줄타기 곡예를 하는 지혜를 사랑한다. 어느 날, 하명과 지혜는 서로를 단원으로서의 애정이 아닌 이성간의 사랑으로 변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둘은 소소된 단체의 단원으로서의 사랑에 고민하며 서로 사랑을 확인해 간다. 그러나 뜻밖에도 누군지 알 수 없는 단원에게 지혜가 강간을 당하게 된다. 지혜는 이로 인해 하명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줄을 타다가 떨어져 입원하게 된다. 지혜가 하명을 의식적으로 피하자, 이를 고민해 오던 하명이 윤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윤재는 지혜가 왜 하명을 피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혜가 강간을 당하던 현장에서 달아나던 청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혜를 강간한 범인은 단원 중 한 사람인 규오였다.

 하명은 결국 지혜를 단념하고 곡마단을 떠난다. 단원과 곡마단을 아끼던 단장 준표가 병으로 쓰러지고 그의 동생 광표가 새 단장으로 옮겨온다. 광표는 부정을 저지르고 결국 단원들을 따뜻하게 뒷바라지해 오던 총무 명수를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단원들은 하나 둘 '일월 곡예단'을 떠나고 그 떠난 자리는 광표가 데려온 단원들로 채워져 간다. 어느덧 단원들간에는 그전부터 있던 곡예 단원과 새로 들어온 단원들로 양분되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광표가 대낮에 술에 취해 곡예를 부리다가 실수를 저지른 석이네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일월 곡예단'은 파국을 맞게 된다. 석인네는 경북 풍기에서 공연을 할 때, 그 곳 관객과 눈이 맞아 6개월 동안 동거하다가 얻은 석이를 데리고 이제까지 곡마단에서 살아온 여자였다. 그리고 석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석이를 아버지에게 보낸다. 그 일로 인해서 석이네는 술로써 나날을 보내며 넋을 잃고 살아온 단원이었다. 이러한 석이네를 광표가 폭행한 것이다. 석이네가 폭행을 당한 것이 발단이 되어 윤재를 비롯한 단원들은 광표와 맞서 싸우게 된다. 결국 늙은 윤재는 쓰러지고 단원들은 광표에 대항하다 곡예단을 떠나게 된다.

 홀로 남은 석이네가 술에 취해 자정 무렵 돌아온 그녀가 불을 켜려고 성냥을 그어 대자 바람에 천막이 흔들려 그만 불이 붙고 만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거세게 번져서 곡마단의 천막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가난과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단원들 중, 서로 우정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곡예 단원으로서의 일생을 서로 기대며 살아온 하명과 난쟁이 어릿광대 칠룡이, 여자 곡예사 연희, 그리고 덕보는 서로 새로운 각오로 재생을 다짐한다.

 하명은 햇빛 속에서 가만히 칠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덕보와 연희에게 눈길을 옮겨 갔다.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디든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면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 테니까."

 

 

영화 [부초] 1978 제작

 

  

 이 소설은 곡예단이라는 유랑 집단의 삶의 흐름을 중심축으로 그들 삶의 고통과 파멸, 희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곡예단 천막이 잿더미로 변해 버리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 하명을 비롯한 단원들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어감으로써 인간의 끈질긴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한수산의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를 통하여 인간과 시간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삶의 생성과 소멸을 그려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의 등단 작품인 <사월의 끝>을 비롯하여 <대설부> 등에서도 인간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어 가는가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부초』또한 곡마단이라는, 소외된 집단의 삶의 흐름을 모티브로 하면서 흥행에 따라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공간과 시간적 배경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삶의 고통과 파멸,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의 재생을 '인생의 축도'로서 형상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곡예단 공연장 천막이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 그러나 그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 하명을 비롯한 단원들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곡예단의 예술인으로서 재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부초>는 우리에게 인간 생명의 새로운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