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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심상대 연작소설 『떨림』

by 언덕에서 2009. 10. 23.

 

 

 

심상대 연작소설 『떨림』 

 

  

 

 

 

심상대(1960~ )의 장편소설로 2000년 발표되었다. 8개의 단편을 묶은 연작소설은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먼 옛날 내가 아주 젊고 자유로웠을 때, 나는 장차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그래서 언젠가 소설가가 된다면 우선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리라 작심했었다. 어떤 문고판 책갈피에 그동안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들의 몸에서 하나하나 훔친 불꽃털(陰毛)을 고스란히 모아두었듯이 내 소설 속에 그 여자들과 나누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아두려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성애(性愛)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한 젊음이의 성장사이자 감정 교육의 시말서이며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이 땅의 한 에로스가 구성되고 발휘되고 좌절되고 자신을 의미화하여온 과정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작가가 '심상대'라는 본명을 두고 심미주의자를 강조하기 위해 '마르시아스 심'이라는 필명으로 펴낸 소설이다. 작가에게 성(性)은 단지 삶의 욕망이며, 죽음을 견디려는, 죽음을 대신 체험하려는 극한적인 노력이다. 성애의 고백담 형식을 빌려 씌어진 8편의 연작이『떨림』이라는 제목으로 한 자리에 모여있다.

 "이제는 이야기하여야겠다"는 고풍의 고백 장치를 두고 펼쳐지는 8편의 섹스 이야기는 기실 작가의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미의식이 빚어낸 허구의 서사다. 그러나 작가는 천연덕스럽게도 작중화자에 스스로를 겹치는 서사 전략을 구사한다. 그 위악적 천연덕스러움이 너무 자연스러워 작중화자 '나'와 작가를 구분하기는 싶지 않다.

 탐미적 성애를 통해 드러낸 치열한 생의 의지와 미학적 성취를 다룬 이 연작소설은 성(性)에 관한 가장 파격적인 수사로 인해 대한민국 작가의 소설인지를 의심케 하는 작품집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순수한 본능으로서의 생의 의지”로 성적 쾌락을 감싸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살기 위해 여자를 사랑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는 이야기이지만 결코 포르노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아래와 같이 여덟 편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여인의 초상]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방탕한 성생활을 하는 20대 청년과 어떤 감흥도 없이 섹스를 하면서 무심하고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두 자매를 그린 '딸기',

 2. 홍콩매독으로 몸이 썩어가는 늙은 창녀의 눈을 보면서 성욕을 느끼는 고등학생과 그 학생의 수음을 엿보는 하숙집 여주인을 통해 죽음과 처연한 성욕의 미학을 그린 '샌드위치',

 3. 결혼식 주례를 맡기로 한 자기 소설의 독자와 관계를 맺으며,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육체의 꽃을 탐미하는 소설가 이야기인 '나팔꽃',

 4. 미친 거지소녀를 포함한 세 여자와의 섹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세 개의 우산에 관한 이야기로 권태와 광기의 비를 가려주는 상징으로서의 우산들을 통해 세 개의 독립된 플롯들을 엮어낸 '우산'

 5. 성적 욕망을 가질 수도,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도 없을것 같은 여자들과의 성교로부터 '성의 사회적 기능론'을 끌어내고 있는 '밀림'

 6. 생의 창조적 에너지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유부녀와 이혼남이 꿈꾸는 삶의 일탈의 풍경을 담은 이야기인 '피크닉',

 7. 서른아홉의 남자와 예순넷의 여자가 나누는 정사를 통해, 나이듦과 죽음, 덧없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해내고자 하는 사랑의 의미를 담은 '베개',

 8.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지만 지독하게 그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생의 고독과 그리움에 저항하는 남자의 몸부림을 담은 '발찌'

 

 

소설가 심상대(1960~ )

 

 

 소설가 심상대(1960 ~ )는 통속에서 생의 진심을 걸러내고 세속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낭만적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아는 얘기를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재담을 곁들인 심미적인 문체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연작소설은 그가 '시대의 로맨티스트’임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이 소설이 '한국적인 정서를 잘 알고있는' 역량있는 번역가를 만나 제대로 영역이 된다면 해외에서도 대단한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킬 것이다. 이 소설집은 우리에게 익숙한 여자와 비루한 생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 연작소설을 읽으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파문을 일으켰던 헨리 밀러(1891 ~ 1980)의 소설들을 연상케 된다. 밀러는 끝없이 자유분방한 예술가이며 성(性)을 솔직하게 표현한 자전적 소설을 발표해 20세기 중반 문학에 자유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는 자유롭고 쉬운 미국적 문체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숨기는 감정을 기꺼이 인정하며, 선과 악을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비롯된 희극적 재능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들이 성을 솔직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프랑스에서 복사본이 몰래 들어와 전 세계로 널리 퍼졌다.

 

 

 작가가 전개하는 유치한 연애담이나, 뼈아픈 시대의 뒷골목 이야기, 처연한 성욕을 호소하는 섹스담 등은 야한 이야기에서 생의 진심이 담긴 한편의 고민스런 이야기로 변하여 독자를 '떨리게' 만든다. 연작소설집에 등장하는 많은 여인들은 제각각의 삶의 무게를 안고 헤매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런 다종의 여인들을 통해서 단자화된 인간들간의 관계 즉 소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고 부둥켜안고 서러워하고 그리고 헤어지는 것들은 모두 소통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 소통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고독을 운명으로 부여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은 가장 분명한 소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슬픈 사랑과 운명에 그리고 지상에서의 불완전한 현실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존재와 존재 사이의 완전한 소통을 꿈꾸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