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오정희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

by 언덕에서 2009. 10. 28.

 

 

오정희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

 

  

 

오정희(吳貞姬.1947∼ )의 단편소설로 1979년 [문학과 지성]지에 발표되었다. 6ㆍ25 피난살이 도중에 인천으로 이주해 와 중국인 거리 속에 살게 된 한 소녀의 눈을 통하여, 전쟁이 가져온 비극상을 그려 보이고 있다. 흑인 병사와의 국제결혼을 꿈꾸던 양공주의 죽음과,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어린 소녀들의 슬픈 감수성을 통해 전쟁이 낳은 비극과 그것이 어린 영혼에 준 상처를 날카로움을 동반한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무대가 된 인천의 중국인 거리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무대가 되었던 지역이며, 한국전쟁의 참담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 작품은 화자인 소녀 ‘나’의 시점을 통해 황폐한 중국인 거리의 삶과 그 속에서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렸다. 회상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아홉살 소녀의 감수성을 통해 중국인 거리에서의 삶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낸다. 주인공인 ‘나’의 식구들은 피난지로부터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서 중국인 거리로 이주한 후 일어난 이야기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린 소녀인 나는 6·25 전쟁의 휴전 직후 중국인 거리로 불리는 인천의 어느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의 언덕 위 이층집들과 낡은 적산 가옥들이 남아 있는 중국인 거리는 해인초 끓이는 냄새가 가득한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치옥과 단짝 친구가 된다. 나는 치옥네 집에 가서 치옥과 함께 매기 언니 방에서 놀다 푸른빛이 도는 액체를 마시며 몽롱한 기분에 빠져 보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과 석탄을 훔쳐 먹을 것과 바꾸어 먹기도 하며 지낸다.

 치옥의 언니인 매기 언니는 양공주로 흑인 미군 병사와 동거한다. 치옥은 매기 언니가 흑인 병사에게 받은 물건들을 보며 자신도 양공주가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흑인 병사가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던 매기 언니는 결국 자신을 학대하던 흑인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내 할머니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작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의 옆자리를 빼앗긴 채 우리 가족과 살아가다가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고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있는 시골로 내려간다. 그러나 이내 할머니는 죽고, 그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자유공원에 묻어 두었던 할머니의 물건을 꺼내 보며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또 아이를 낳고, 그날 나는 몸을 둘러쌌던 열기의 정체로 초경(初經)을 경험한다.

 

 

 『중국인 거리』에는 죽음의 사건과 함께 삶과 생명의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 소녀는 이 둘을 통해 혼란과 어두움의 세계뿐만 아니라 삶의 온전한 의미에 보다 접근하게 된다. 「중국인 거리」는 이처럼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상처와 함께 그 속에서 세상의 빛과 어두움을 알아 나가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전후의 한 풍경을 성장서사로 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유년기 체험에 대한 기록으로 일종의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의 색채를 지닌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소녀가 전쟁의 후유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중국인 거리에서 세상에 대한 비극적인 체험을 겪음으로써 사회에 대해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성인으로 성장해 간다는 줄거리 자체가 성장 소설의 구조이다. 특히 양공주의 죽음 뒤 겪게 되는 초경은 어린 소녀에서 여성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는 알을 깨고 부활하는 새의 이미지처럼 또 다른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의 중요한 소설적 장치는 '회상'의 형식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인공의 유년기 체험을 화자가 기억을 통해 회상하는 형식은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참신한 소설 형식이다. 작품은 짧은 문장과 간결한 문체 속에서도 많은 의미를 담아 내고 있다. 특히 소설에서 후각적 이미지를 통한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해인초 냄새'는 유년기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통일되고, 연관된 것으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소설적 형태와 회상의 형식을 가능케 하는 효과적인 기법은 유년기 화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한 소녀가 성인으로 변모해 가는 통과제의를 유년기의 시점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다 생생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유년기 화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해인초 냄새, 회충약에 의한 배앓이, 새끼를 잡아먹는 고양이에 대한 묘사는 기억의 가장 깊숙한 저층에 자리잡고 있는 원체험으로서 소설의 구체성을 획득하게 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