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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손창섭 단편소설 『잉여인간(剩餘人間)』

by 언덕에서 2009. 10. 20.

 

 

손창섭 단편소설 『잉여인간(剩餘人間)』

 

 

손창섭(孫昌涉.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8년 [사상계] 9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비 오는 날>, <혈서> 등과 함께 손창섭의 전후소설에 속하는 작품이다. 한국 소설은 전후 소설에 이르러 그 의식이나 기법 면에서 현대 소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후 소설이란 한국전쟁 이후 약 10여년간 손창섭, 장용학, 서기원, 오상원, 이범선 등의 소설에 나타나는 어떤 경향인데 전쟁의 참혹성과 거기에서 오는 허무의식,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생활의 의욕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황폐한 삶의 양태 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의식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참한 인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의 출현은 인간 자체의 정신적 결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후 현실의 어두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특징적이다. 바로 이러한 점,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밖의 역사나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과장한다는 비판을, 전후세대를 이어 등장한 60년대 작가들로부터 듣게 된다.

  이 소설은 전후의 사회상과,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몇 가지 유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자기 능력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며 침착한 기품과 교양을 잃지 않는 인물 '서만기'가 이야기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간형을 통해서 병든 현실과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소설가 손창섭( 孫昌涉.1922∼2010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만기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날마다 출근하다시피하는 두 사람이 있다. 비분 강개파 채익준과 실의의 인간 천봉우가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은 서만기의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매일을 변함없이 서만기의 병원에 먼저 나와 대기실에 앉아있다. 신문을 보고 있던 익준은 가짜약을 만들어 팔다 법망에 걸린 범죄단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그만 흥분이 되자 이에 동조해 주지 않는 봉우에게 핏대를 올리며 나가버린다. 천봉우는 사실 매사가 흥미 밖이었다. 늘 수면 부족을 느끼는 봉우의 실의 상태는 6.25동란을 치르고 나서 현저해졌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여러 가지 불미한 소문을 퍼뜨리는,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였다. 한편, 서만기는 이들과 달리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건강한 정신과 성실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다서만기의 문제점은 재산이 없고 낙후된 병원 시설로 인해 돈을 많이 못 벌어 지금의 치과 의원도 봉우의 아내가 무료로 차려준 것이다. 가끔 병원에 들러 치아를 치료하고 가는 봉우의 아내는 만기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여 유혹한다. 그럴 때마다 만기는 적절히 거절하지만 봉우의 아내도 보통은 아니다.   

  어느 날, 병원으로 익준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러 온 것을 보고 만기는 익준이 집을 나간 것을 알게 된다. 간호원 미스 홍은 봉우가 퇴근 후 무작정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만기에게 알려온다. 집에서 만기는 처제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고백받고 마음이 더욱 착잡해진다.

봉우의 아내는 만기에게 애정을 고백하다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병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이 무렵 익준의 아내가 죽는다. 익준은 가출 후 돌아오지 않아 만기와 미스 홍, 봉우 셋이서 장례를 치러준다. 장례비는 봉우의 아내에게서 꾼다. 장례를 마친 날, 노가다로 얼굴이 까칠해 진 익준이 집에 돌아온다. 엄마가 죽었다며 아이들이 울며 매달리자 놀란 그는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다. 

    

영화 <잉여인간 Extra Humans> , 1964 제작

 

 이 작품은 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 등의 신문 연재소설을 쓰고는 절필하여 말 그대로 철저히 1950년대를 살다간 1950년대적 소설가인 그의 작품들은, 대개 현실과 조응하지 못하고 불구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전후의 비인간적 상황과 그 속에서 결국 피해자가 되는 암담한 상황을 그렸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맹목적 인간 혐오와 부정의식에서 비교적 벗어난 작품으로 매우 정상적인 인물인 치과의사 서만기를 등장시켜 익준과 봉우 등 선량하지만 자기 현실에서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하여 외면하는 현실세태를 역설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손창섭의 작품 중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비 오는 날>, <낙서족>, <인간 동물원초()> 등 대부분의 작품이 부정적이고 불구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점에 비해 '서만기'라고 하는 긍정적인 인물을 내세워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 인간'이란 글자 그대로 '남아 돌아가는 인간'이다. 천봉우와 같은 실의의 인간상 손창섭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유형이고, 채익준 역시 그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개과천선의 모습을 보인다.   

 

♣  

 

  그러나 작중 인물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봉우가 간호원을 짝사랑하지만 조소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그린다거나, 익준의 비분강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거품같이 흩어져도 야유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모습은 병적 회의주의에서 탈피하여 건전한 도덕 의식을 지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채익준과 천봉우, 이들은 모두 전쟁이 남긴 잉여 인간이다.

  서만기는 이들을 포용하고 자신의 문제들과 이들이 가진 문제들을 함께 풀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게 현실을 헤쳐 나가고 있다. 여러 여성들의 끈질긴 유혹도 점잖게 물리치고 가족과 친구들을 잘 돌보는 그를 미화함으로써 전쟁이 가져다 준 불구성과 황폐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강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