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대하소설 『장길산(張吉山)』
황석영(黃晳暎. 1943~ )이 [한국일보]에 1974년∼84년까지 연재한 역사 대하장편소설이다. 1962년 경복고교 재학 중 <입석부근>이 [사상계]의 신인상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한 황석영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이 다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객지> <아우를 위하여> <낙타눈깔> <돼지꿈>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과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 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조선 숙종 때 유명한 의적부대였던 장길산부대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노비ㆍ광대ㆍ농민ㆍ창기ㆍ광부 등 그 사회 민중들을 작중인물로 삼아 그들의 참담한 생활, 그리고 상공인 세력의 부상과 중인층의 성장, 기층민의 신분해방 운동과 미륵신앙 등을 폭넓게 상호 연관 지어 신분체계가 문란해지고 봉건체제가 해체기로 접어들 무렵의 민중사를 복원해 준다. 특히 민중들 사이에 은밀히 내려오던 미륵신앙을 바탕에 깔고서 검계와 살주계 사건, 녹림당 이야기를 통해 미륵보살의 용화세계를 꿈꾸는 의적집단의 형상이 탁월하여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최대의 역사소설로 손꼽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 효종 때,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난 길산은 광대 장충의 구원으로 재인 마을에서 성장한다. 그는 같은 마을의 역사 이갑송,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구월산 화적인 마감동 등과 사귄다. 창기였다가 버려진 묘옥과 정분을 맺은 길산은 해주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수가 되지만,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양부모의 뜻을 어길 수 없어 누이동생인 봉순과 결혼한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금강산에 들어가 운부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차츰 '백성'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한다. 숙종 10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길산은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민 구출에 힘쓰고, 그의 이름이 백성의 입에 오르내린다. 조정에서는 토포를 명하나 길산의 활약은 더욱 빛날 뿐이다.
정묘년 4월, 입국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길산의 활빈도, 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 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이 결속한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 세계를 이룩한다는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한다. 이때 고달근이 큰 이익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이미 달아난 뒤이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징치하고 최형기를 처단한다. 해서와 관북 일대에도 장길산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출몰해 조정을 괴롭히지만, 이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군사 독재 권력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억압을 받았던 시대이다. 작가는 이와 유사한 역사적 배경으로 18세기 숙종조를 설정하고, 여기에 실존 인물인 장길산을 등장시켜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민중들의 생명력을 표현함으로써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 소설은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장길산'이라는 인물을 찾아내어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시대적 변화를 함께 엮어 놓았다. 천노의 소생인 그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의지를 키워 나가는 과정,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녹림당을 조직, 지배 계층에 대항하는 모습, 그러한 개인적 실천력이 민중에게로 확대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우선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발견된다. 등장인물 중 '묘옥'과 '이경순'을 제외한 대부분이 숙종 때의 공안에 기록된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아예 무시되기도 한다. 기존의 역사 소설류가 대체로 실제의 사건과 인물의 행적이나 따르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한 영웅 소설이 아니다. 당대 사회 현실을 광범위하고 다채롭게 그리고 있으며, 민중 세력이 확고한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반봉건적 변혁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 지배층의 관점에서 쓰인 사료들을 철저히 민중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한 작가의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시대 민중들의 언어와 관습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풍속사적 가치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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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문제점도 적지 않다. 당대 사회의 경제 수준을 지나치게 근대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고 있다거나, 변혁 운동을 주도하는 민중 출신 지도자들을 너무 지식인이나 영웅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어서, '역사적 실체'보다 '낭만적 전망'이 앞선 느낌이 든다. 또 표현면에서는 장면 중심적인 묘사보다 작가의 직접적 설명에 치중하고 있는 점, 인물의 심리를 과다하게 묘사하여 사건 전개의 리듬이 끊어지는 점 등이다.
그러나 몇 가지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민중 의식의 역사적 재인식을 높은 수준에서 성취한 걸작이다. 특히, '장길산'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포부는 좌절되었지만, 그의 정신이 면면히 계승된다는 결말 처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길산'이 종적을 감추자 관가에서는 가짜 '길산'을 잡아 죽이고 그에 대한 소문을 근절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하층민 사이에 널리 퍼지고 그의 애환을 담은 탈춤이 생겨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마지막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민중의 희구와 갈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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