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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영한 연작소설 『왕룽 일가』

by 언덕에서 2009. 9. 10.

 

 

 

박영한 연작소설 『왕룽 일가』 

 

박영한(朴榮漢, 1947~2006)의 중편소설로 1988년 발표된 중편소설집 <왕룽일가>의 표제작이다. 중편소설 왕룽 일가』는 서울 근교의 우묵배미라는 농촌을 삶의 무대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작 소설의 일부분이다. 이 연작들은 각각 자체의 형식적인 완결성을 갖춘 중편들이지만, 전체가 상관 관계있는 한 편의 장편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소설집 <왕룽 일가>왕룽 일가, <오란의 딸>, <지옥에서 보낸 한철> 등 세 편의 중편소설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박영한은 1978년 <머나먼 쏭바강>을 장편소설로 개작해 출간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소설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이후 창작에 전념하였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젊은 시절에 서울 인근의 도농(都農)의 접경지대를 떠돌며 관찰하고 체험한 생활을 바탕으로 왕룽일가와 <우묵배미의 사랑>을 잇달아 출간했다. 박영한은 도농 접경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해학적이고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 내 한국 세태 소설의 한 계보를 형성하였다.

 연작소설 <왕룽일가>를 원작으로 1989년 2월~4월 KBS 2 TV에서 수목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고, <우묵배미의 사랑>을 원작으로 1990년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KBS 2TV에서 수목 미니시리즈 <왕룽일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왕룽 일가> :

‘홈 드레스’와 ‘검정 고무신’의 갈등은 도시와 농촌,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불광동 새댁의 시집살이와 시아버지 필용 씨의 늦바람이라는 두 사건이 놓여 있다. 불광동 새댁은 서울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호텔 프런트에서 근무하며 도시 문화를 몸에 익힌 인물이다. 그녀는 화려한 복장과 세련된 태도로 시골 마을에 나타나, 전통적 생활 방식에 익숙한 시댁 식구들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는다. 정장 차림의 외출, 바바리코트에 선글라스를 쓴 채 대문을 들어서는 모습 등은 농촌적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도시적 감각을 지닌 며느리가 가져온 소파, 컬러텔레비전, 화장품 등은 농촌적 검소함과 충돌하며 크고 작은 갈등을 유발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단순한 가족 내 갈등을 넘어, 전통과 근대, 아날로그와 소비문화의 충돌을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두 문화가 공존하기 어려운 현실은 우스꽝스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반조차 흔들리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필용 씨의 늦바람 사건도 이러한 변화의 또 다른 면이다. 절약과 근면으로 부를 이룬 전형적인 농사꾼인 그는 며느리 문제로 아내와 크게 다투고 별거와 이혼 위기까지 겪는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점점 영악하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따른 인간 의식의 전환을 반영한다. 위자료를. 두고 벌어지는 실랑이 속에서 과거의 순박한 농촌 부부는 자취를 감춘다. 결국. 아들 부부는 읍내로 분가하게 되고 이후 필용 씨는 외모와 생활 태도에 큰 변화를 보이며 늦바람이 난다. 그러나 그 바람은 돈을 노린 여인의 기만으로 끝나고 그 허망함 속에 또 하나의 갈등이 마무리된다. 작가는 이러한 희극적 사건들을 통해 필용 씨든 불광동 새댁이든 모두가 자기 자리를 잃고 흔들리는 시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오란의 딸> :

 필용 씨의 딸 미애가 겪은 폭행 사건은 성에 대한 상반된 두 관념생명과 천진함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성과, 환락과 타락으로 물든 황음의 성을 대조시키는 소설의 핵심 축이다. 미애는 외향적으로는 도회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순수성과 부끄러움을 간직한 인물이다. ‘와의 관계나 태도에서도 그것이 드러나며 이는 그녀가 타락한 인물이 아닌 건강한 성 인식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한다.

 필용 씨 역시 건강한 생명력에 대한 외경심을 지니고 있으며 소의 생식기를 거리낌 없이 자랑하는 모습에서 성을 부끄러운 것이 아닌 생명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미애와의 부녀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미애가 아버지의 늦바람을 이해하고, 필용 씨가 딸과 비슷한 기질을 지닌 문제 많은 암소를 각별히 아끼는 장면들은 이들의 내면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을 전체는 점점 건강한 성 개념에서 멀어지고, 조리 건널목의 살인, 여공과 여학생의 피해, 미애 사건 등이 겹치며 황음과 폭력의 기운이 만연한다. 젊은이들은. 방종과 무감각에 물들고 타락한 성 풍속은 마을의 일상을 왜곡시킨다. 특히 성에 관한 소문은 과장되고 무차별적으로 퍼지며 미애와 명자 같은 피해자들에게는 사건 그 자체보다 소문이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역시 아내가 젊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황당한 소문의 대상이 된다.

 형수는 본래 듬직하고 순박한 청년이지만 미애를 향한 열정이 일그러지면서 저속한 말투와 폭력적 본능을 드러낸다. 그는 경쟁자인 수정사에게 거짓말로 이간질하는 등 건강한 청년에서 타락한 인물로 변모해 간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 풍속의 타락이 인간 내면에 어떤 식으로 침투하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 소설은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성 관념이 어떻게 황음과 소문의 문화에 밀려나는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일상과 윤리, 공동체의 감수성이 어떤 방식으로 파괴되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

살랑거리며 살짝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과 같은 성품을 지닌 홍 씨는 본래 부지런하고 솜씨 좋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적 인간형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잡일을 보상 없이 해줄 정도로 인정이 많고 새 사냥이나 돼지 잡는 솜씨에서도 경건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가 술주정과 일탈을 일삼는 문제 인물로 인식된다. 이러한. 모순된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착취와 외부 인물들의 탐욕에서 기인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전원의 평화로운 새벽이지만 경운기 사고로 현실은 활극의 장임이 드러난다. 우묵배미는 조용한 마을 같지만 여주댁과 홍 씨를 중심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분란은 대부분 돈 문제에서 비롯되며 특히 홍 씨는 광용 씨에게 월급을 떼이고 여주댁에게 부려지며 배 서방네에게는 병든 아내를 이용당한다. 착한 성품이 약점으로 작용하면서 그는 점점 억울함과 분노를 쌓아간다. 결국 홍 씨는 타인의 영악함에 맞서기 위해 자신도 날이 서게 되고 우묵배미는 순박한 공동체가 아닌 탐욕과 불신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마을의 변모는 외부의 개입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의 부자인 광용 씨는 최초의 일탈을, 장 씨는 홍 씨를 부추겨 마을을 떠나게 하면서 삶을 파탄 낸다. 외부의 타락이 내부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다.

 밤 몇 줌을 두고 마을이 아수라장이 된 사이 외부인 병삼이가 나타나 세숫대야와 닭을 훔쳐가는 장면은 이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는 사이 외부 세력이 실속을 챙기고 마을은 더욱 피폐해진다.

 에필로그에서는 소값 파동으로 마을이 또다시 손해를 보고 마을을 떠났던 홍 씨는 장 씨와 다툰 후 다시 여주댁의 일꾼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후일담은 우묵배미의 활극이 결국 서로를 갉아먹는 피라니아식 싸움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결국. 작가는 홍 씨나 여주댁 같은 인물들이 아무리 치사해져도 여전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공동체의 파괴와 인간성의 타락을 연민과 비판의 눈으로 그려낸다.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 1990년

 

 작가 박영한은 그의 등단 작품인 <머나먼 쏭바강>을 비롯하여 <인간의 새벽>, <노천에서> 등 일련의 장편에서,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소설적 탐구를 시도한 작가이다. 그는 민족의식, 자유, 양심, 전쟁, 이데올로기, 휴머니즘, 분단 현실 등의 중량감 있는 주제를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경험과 거시적 상상력에 의해 구도화해 낸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은 삶의 구체성보다는 관념적 추상에만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관념적 세계에 대한 분석과 통찰은 <지상의 방 한 칸>을 비롯하여 『왕룽일가』, <오란의 딸>, <지옥에서 보낸 한철>, <우묵배미의 사랑> 등의 연작에 이르러서는 중후하고 리얼리티 한 문제를 통해 삶의 구체적 현실 세계로 전환된다.

 

 

 리얼리즘 소설의 한 성과로 주목받는 왕룽일가이후 소설들의 주요 무대인 ‘우묵배미’라는 마을은 바로 우리 시대의 보편적 삶의 숨결이 함께 하는 삶의 표본이 되는 농촌이다.

 따라서, 이 『왕룽일가』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은 1970년대의 이문구의 <우리 동네> 연작이 갖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 문제와 일맥을 이루면서 우리 시대의 삶의 보편적 체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는 의의를 지닌다. 작가 박영한은 ‘우묵배미’를 반농 반도시의 전형적인 축소 공간으로 설정하면서, 우리 시대의 현실을 관류하는 인간의 보편적 삶을 그려내었다.

 또한, 박영한의 작품들은 해학적이고 둔중한 문체를 장점으로 하면서, 우리 시대의 보편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1980년대의 중요한 소설적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