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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정원(庭園) / 강은교

by 언덕에서 2009. 8. 27.

 

 

정원(庭園)   

                                                                                                        강은교

 

옛날 아주 옛날

옛날 내 살던 곳에

빛 하나 소리 하나 기쁨 하나 살았네

성도 이름도 속맘도 몰랐지만

참 깊이 우린 서로 사랑했네

산 강물 바다 넘고 넘어

이제 꽃지는 천지에

어디갔을까

모두 영 가버렸을까

 

옛날 아주 옛날 옛날

참 깊이 우린 서로 사랑했네

산 강물 바다 넘고 넘어

이제 꽃지는 천지에

어디갔을까

모두 영 가버렸을까

 

 

- 계간지 <창작과 비평> (1977 봄호) 

 

 

 

 


 

 

이 시는 한동헌이 작곡한 노래에 양희은이 노래하여 나름대로 알려지기도 한 시이다. 우리시대의 대표 여류시인인 강은교 시인(1945~ )의 시는 허무를 직관의 인식작용으로 포착하고, 내면의식의 승화작용을 시도하면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대표 시집 <허무집>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의 시는 짙은 허무의 그림자로 싸여있다. 그 허무는 무속(巫俗)에 대한 시인 나름의 인식 및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개성 있는 여성적 발상에 의해 자기가 좋아하는 시어(詩語)들을 여성적 운율에 담아 노래한다. 예를 들어, 사랑의 불교적 윤회(輪廻)에 대한 직감을 보여주는 <우리가 물이 되어>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는 그 당시 여류 시인들이 보여 주고 있던 폭이 좁은 진부한 주제의식과 소박한 서정의 한계를 뛰어넘는 심도 있고 참신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당시 삶의 연륜이 짧은 그가 사물과 삶에 대한 인식이 심화될 수 있었던 계기의 하나가 뇌종양의 병고에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허무주의는 그의 초기 시에 있어서 창작 방법상의 주요한 모티브로 자리 잡고 있다. 허무의식을 통해 삶과 죽음의 심연을 파헤치려는 시각에서 씌어진 그의 시는 단순한 느낌의 자세에서 읽혀지기를 허락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자세를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그가 대학 시절을 보낸 1960년대 후반은 4ㆍ19와 5ㆍ16을 거쳐 월남파병, 그리고 장기집권을 위한 이른바 근대화정책이 졸속정책으로 진행되면서 독재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부조리한 사회 현상이 팽만해지고 진정한 인간다움의 삶이 극도로 소외되어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점에 대한 반성은 위의 시 '정원(庭園)'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정원(庭園)의 사전적인 의미는 '집 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이다. 시인은 그러한 정원과 같은 이미지의 고통 없는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살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집이 있었고 집 안에는 뜰이 있었다. 꽃나무들도 심겨져 있었다. 그 속에 희망의 빛이 있었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있었고 삶의 기쁨도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에덴동산과 같은 정원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모두가 떠나버렸다. 아니, 누군가가 떠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억압된 외부적인 사회현실의 상황 속에 젊은 시절 그의 허무주의는 올바른 삶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현실 대응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가 어떠하던 간에 위의 시 정원(庭園)은 아름답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 잊어버린 것들, 찾아야 할 것들, 다시 사랑해야 할 것들, 사과해야 할 것들, 화해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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