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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아니오 / 신동엽

by 언덕에서 2009. 8. 24.

 

 

 

 

 

 

 

아니오 

 

                                                   신동엽

 

아니오 

미원한 적 없어요,

산 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리야. 차마,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능선(稜線)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옷입은 도시 계집 사랑했을리야.

 

 


-<신동엽 전집>( 창작과 비평사 1975)










 



이보다 훌륭한 시는 쌔고 쌨지만, 위의 시보다 간단명료하면서 강한 메시지를 품은 사랑시를 나는 보지 못했다. 나의 과문함 탓이겠지만 요즈음 발표되는 시들에게선 왜 이처럼 운율이 두드러지고 호소력 강한 시를 찾을 수가 없을까.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차이이겠지만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청소년들이여, 시를 읽으세요. 제가 여기에서 소개하는 신동엽(1930∼1969)은 양미간이 좁은 얼굴의 개그맨이 아니고 불꽃처럼 살다간 위대한 시인의 이름이다.

 흔히들 신동엽과 김수영을 다만 참여시의 양대 산맥쯤으로 생각하지만 두 사람의 시세계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수영이 도회지 출신(종로6가)으로 도시적 감수성의 시를 썼다면 신동엽은 농촌 출신으로 농촌 공동체적,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지녔다. 주제 면에 있어서도 김수영이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출발해 '자유'의 문제를 탐구했다면 신동엽은 이것을 민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시어들은 그의 실제 삶 체험에서 녹아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동엽은 외세 강점기인 일제 말기에 태어나, 외세의 대리전쟁이랄 수 있는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엔 밀려드는 외세의 문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우리의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시인이었다. 그가 오늘날 참여시의 원조 격으로 분류되는 탓에 그의 시어가 지닌 농밀한 서정성을 등한히 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의 시가 지닌 품격은 단지 그가 참여적인 강한 메시지를 담은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가 지닌 높은 문학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평전과 미발표 시집 및 산문집을 접해 보면 무엇보다도 그는 ‘사랑’의 서정시인으로 출발하여 우람하게 민족정서를 퍼 담는 장시(長詩), 담시(譚詩)의 민중시인으로 나아간 것임을 살필 수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시가 위의 시 '아니오' 일 것이다. '세계의 /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 옷 입은 도시 계집 사랑했을 리야' 라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가 진정 사랑하고 동경했던 세계가 무엇인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세계는 그 한쪽 끝에 식민지 정서와 6ㆍ25와 분단이라는 깨뜨려버려야 할 어두움이 도사려 있고 반대쪽에는 민족유년기의 사랑 사화(史話)인 아사달, 아사녀와 부여 곰나루의 동학과 수유리의 4ㆍ19, 그리고 민족통일의 벅찬 꿈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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