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나직한 송가(頌歌) / 김남조

by 언덕에서 2009. 8. 28.

 

 

 

 

 

 

 

 

 

 

나직한 송가(頌歌)

                       

                            - 金樞機卿 着座式典에

 

                                         김남조    

 


한국의 흰 꽃에선

순교하신 분들의 피내음이 납니다

차마 눈도 못뜰 피범벅의 형장(刑場)에서

소름끼치며 불 붙이던

영혼의 햇불

그 순교

주의 말씀으로는 사랑이옵는 그것


하긴 그만큼은

아프고 못견딜 열이었기에

땅에 뿌리면 몇 갑절로 솟아오르는 나무가 되고

신령한, 살아있는 바람으로 불어

세게의 뭇 변방에

청청한 고함으로 번지었거니


초록이 흐르는 오월

주의 형관(荊冠)을 짜는 가시나무조차

함께 유성(油性)의 햇살을 쬐는

생명과 관용의 절기

또 이 날에

소박한 축연, 나직한 송가들이 울리며

한 어른을 앞세우고

당신 앞에 더 한결 간망(懇望)의 눈을 적시옵니다

주여


신앙을 위해선

이미 목숨을 바칠 까닭도 없어졌는데

무엇으로 저 넋을 건지리까


소리없는 주악(奏樂)

눈감아 가슴 더욱 깊이에 울리옵거니

한국의 흰 꽃에선

순교하신 분의 피내음이 납니다



- 시집 <영혼과 빵> (성바오로서원 1973) 

 


 



 

김남조 시인(1927~ )은 1950년대에 등장하여 전세대인 모윤숙ㆍ노천명과 후세대인 1960년대 시인들을 잇는 교량적 역활을 담당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와 계율이다. 때문에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긍정과 윤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종교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배경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욱 짙고 깊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한편 기법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어 있어서 그 형상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강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이러한 리듬 때문일 것이다. 김남조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의 아름다움은 '인간에 대한 애정, 삶에 대한 경건함' 그리고 사랑의 단심(丹心)을 여성다운 곱고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한 점에 있다.


 그는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사랑과 인내' 등을 종교적으로 승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 계율을 바탕으로 언제나 사물을 긍정시 여기고, 윤리 의식이 상당히 묻어 나오는 시를 창작했으며 제9시집 <동행> 이후 신에의 절대 귀의가 뚜렷이 드러난다.


 이 시는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의 추기경 착좌식전(着座式典)에서 쓴 시이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의 행운과 행복을 기원하는 시가 범람하고 남북 정상회담이 있으면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기원하는 '기념시', '행사시'가 봇물을 이룬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교인이던 교인이 아니던 뭔가가 기존과는 다른 아름다움과 따스함 그리고 신성함과 경건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추기경은 로마교황이 선임하는 최고 고문으로서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관청의 장관 등의 요직을 맡아보며, 교황선거권을 행사하는 사제 중의 최고위직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4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ㆍ동양권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시인은 '한 어른'의 추기경 착좌가 차마 눈도 못뜰 피범벅의 형장(刑場)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하신 분들의 피내음에서 기인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19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신도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諡福)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福者位)는 모두 103위가 되었다. 그리고 19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聖人)으로 승품시켰고, 19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식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승품식을 친히 집전하였다.


 김남조 시인이 위의 시를 쓴 지도 어언 40년...... 2009년 2월 16일, 세월은 흐르고 흘러 김추기경은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심고 선종하셨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한 이 나라, 이 아름다운 터전에 아직도 개인 간, 종파 간, 정당 간에 미움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진다. 이러한 성인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났는데도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먼 것인가.(2009. 2. 16자 조선일보, 법정 스님)'


 김남조 시인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과 맑게 정화된 듯한 기운을 안겨 준다. 아름다운 흰 꽃은 아프고 못견딜 열이었기에 마침내 땅에 뿌리면 몇 갑절로 솟아오르는 나무가 되고 신령한, 살아있는 바람으로 불었던 것이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리(羑里)에 가면 / 노태맹  (0) 2009.09.01
진달래 / 이영도  (0) 2009.08.31
정원(庭園) / 강은교  (0) 2009.08.27
북한강에서 / 정호승  (0) 2009.08.26
분수(噴水) / 김춘수  (0) 200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