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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인훈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仇甫氏)의 일일(一日)』

by 언덕에서 2015. 4. 7.

 

 

최인훈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仇甫氏)의 일일(一日)』 

 

 

최인훈(崔仁勳, 1936 ~ 2018)의 연작소설로 197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60년대 후반기의 험난하고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그린 최인훈의 연작소설로 1934년에 쓴 박태원의 동명 소설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총 15편의 연작소설로, 1969년 소설가 구보씨의 1일-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을 [월간중앙]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1972년 7번째 작품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노래하는 샤갈을 [월간문학]에 발표하기까지, 발표 매체를 달리하여 발표된 단편소설들로,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은 그 첫 번째 작품이다. 

 월남한 독신 소설가 구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일상생활과 지적 탐구를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분단시대 지식인의 모순과 갈등을 파헤쳤다. 각 단편들은 주인공 구보씨가 아침에 일어나 일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심경을 서술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연대로 보아 1969년의 동짓달부터 1972년 5월까지의 상황이지만, 삶이 근본적으로 하루 일과의 되풀이가 아닌가 하는 이해에 입각해서 소설 제목을 ‘∼씨의 일일’로 붙인 듯하다. 특별한 사건은 없으며, 구보씨가 만나는 인간, 사물, 현상에 의해 촉발되는 어떤 느낌과 생각을 관념적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관념들은 매우 재치 있고 세련되어 있다.

 이 작품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사건들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이 각각의 사건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내면 의식을 들여다 본 자의식 소설이자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다.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은 1969년 말 어느 날 아침 주인공인 소설가 구보씨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9년 동짓달 그믐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구보씨는 자광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문학 강연을 하고 학생들과 토론을 한 뒤, 강연장에서 만난 문우들과 음식점에 들른다. 이어 다방에 들어갔다가,

 오후에는 잡지사에 가서 현상소설 심사를 마치고 심사료를 받은 후 심사를 함께 한 사람들과 다시 다방에 들른다.

 거기서 소설가 남정우를 만나고 나서 광화문 쪽으로 가다가 이번에는 극작가 배걸씨를 만나 함께 중국집에 들러 배갈을 마시며 연극 이야기를 한다.

 5시 반쯤에는 술집에서 열린 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어울려 이야기를 하지만, 마치 대감들 앞에서 한 상 얻어먹는 거지같은 슬픈 기분을 느낀다.

 8시에 모임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져 돌아가는 길에 굶주린 거지같은 자기 몰골을 생각하고 화가 난 구보씨는 자신에게 다가와 구걸하는 여자에게 적선을 하고 황황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동명의 제목을 가진 소설이 세 편 있다. 1934년 박태원, 1969년∼1972년 최인훈, 1991년∼1995년 주인석의 작품이 그것이다. 박태원의 경우가 1930년대 경성(서울의 병리적 현상에 대한 탐구라면, 최인훈의 작품도 서구화ㆍ도시화에 대한 비판을 기본 색조로 한다. 주인석 역시 부조리한 사회 현실과 급변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또 하나 두드러진 공통점은 그들 모두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가의 임무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문학 행위에 대한 반성일 터인데, 이를 통하여 참다운 소설가로 존재하기 위한 자기 쇄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 최인훈은 이 연작에 대해 ‘구보라고 하는 소설가의 마음의 레이더에 들어오는 생활의 파편들을 미분하고, 적분하면서 그의 이성과 정서의 장세를 각각으로 추적한 작품’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그 결과 서사적 줄거리만을 좇아가다 보면, 특별하게 의미심장한 사건이나 갈등이 등장하지 않아서 독자는 실망하게 마련이다. 즉 구보씨가 경험하는 사물과 현상이나 만나는 인물들은 그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으며, 그의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자광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득 이 대학이 불교대학임을 깨닫는 순간, 구보씨의 관념이 작동한다. 우리의 고유문화요 유구한 정신세계였던 불교정신에서 서구의 그 어떤 것에 맞먹는 미학 이론 하나 구성하지 못한 동양문화, 한국문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거기에는 구보씨 본인의 책임도 담겨있는 것이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구화로 일관된 이 사회를 ‘초토(焦土)’로 규정한다. 그리고 ‘문화사적인 분노의 전사’가 되어 지나친 서구화에 대항해 싸우리라는, 그럴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 '겨우 그 부끄러움을 빠져나왔다.‘

 스님 한 사람과 불교재단학교라는 구체적 대상을 시발점으로 하여 문화적 반성과 문화적 임무 확인하기라는 일련의 사유 과정이 완결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감상에 있어서는 사물 자체나 인물간의 관계보다는 그 사물과 인간으로 인한 구보씨의 관념 내용을 살피는 것이 포인트가 될 것이다.

 분명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박태원의 작품에 대한 패러디이다. 물론 이 작품은 1930년대가 아닌 최인훈이 처한 197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의 내적 의식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최인훈은 박태원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소설쓰기를 보여준다. 작가가 경험하는 세속세계에 대한 관찰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 대한 관념을 삽입하고, 꿈과 환상을 개입시켜 메타적인 성격을 심화시킨다. 이 연작은 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의 하루를 기술하고, 그 내면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자기 반영적 형식을 보여준다. 

 

 

 구보씨의 하루에 대한 자잘한 기록에는 그의 내면적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작가는 삶과 문학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작가는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작가의 일상을 통해 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우울한 자의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연작에서도 물론 주인공의 의식의 내부와 그가 경험하는 환상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전략) 이층 시멘트 집의 뒷모습이 보이고 작은 창고 같은 집이 있고, 느릅나무 큰 그루가 몇 서 있었다. 구보가 놀란 것은 그 풍경이 그의 북한 고향의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뒤뜰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옆으로 여러 번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많은 세월을 사이에 두고, 문득 마술처럼 눈앞에 나타난 풍경에 구보씨는 홀렸던 것이다.

 ‘아저씨.’ 누가 옆에 와 선다. 그는 돌아보았다. 머리끝이 쭈뼜했다. 정말 헐벗은 한 여자가 그에게. 밤처럼 캄캄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쩐 일이었던지, 그 여자의 얼굴에서. 벌써 옛날에 갈라진 한 여자를 보았다고 헷갈린 것이다.  - 본문에서

 마술처럼 나타난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은 피난민으로의 자신의 처지를 환기시켜주고, 상황을 어렵게 견디며 소설쓰기를 말고 나가야 하는 자신의 초상과 동일시된다. 갑자기 나타난 헐벗은 여자 역시 과거에 대한 환각을 보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환각은 상황과 개인의 문제, 그리고 개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작품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은 등장하지 않고, 다만 구보씨의 하루 행적만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한 행적의 기록 속에는 구보씨의 내면, 곧 삶과 문학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끊임없이 표출된다. 주인공 구보씨는 6ㆍ25전쟁 때 월남한 소설가로, 상당한 지식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 후반의 어둡고 우울한 시대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헐벗은 느릅나무가 묵묵히 찬 겨울바람을 견디듯 시대를 견디며 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 준다.

  첫 번째 작품과 마지막 작품 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작품들은 각각 하루의 일상을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반복적인 구조를 지닌다. 따라서 3년이라는 긴 기간 역시 이 연작에서는 하루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작 소설 자체가 작가 자신의 예술관을 반영한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의 험난함 속을 사는 한 양심적인 예술가의 초상"을 제시한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