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말로 장편소설『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Malraux, Andre-Georges.1901∼1976)의 장편소설로 1933년 발표되었다. 그해 콩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혁명의 혼란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죽음을 겁내지 않고 용감히 행동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말로의 행동주의 문학의 기조이다.
장제스가 공산당을 이용하여 상하이에서 북방군벌을 몰아내고 즉각 공산당을 탄압한 1927년의 상하이 쿠데타를 배경으로 하여, 연대적인 행동의 중심 속에서도 고독감에서 헤어날 수 없는 테러리스트 첸(陳), 고독에 사로잡히면서도 집단적 행동과 우애 정신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혼혈아 기요(淸),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혁명가 카토프와 같은 주요 인물 외에, 기요의 아버지이며 아편중독자인 대학교수, 권세욕과 에로티시즘의 화신 같은 자본가, 공상과 기행 속에서 현실을 잊으려는 성격 파탄자, 공산당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비밀경찰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 공산당 지도 아래 있는 노동자들이 무장봉기를 하는 데는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는 정박 중인 외국 배에 실려있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선 무기 매매 서류가 있어야만 한다. 테러리스트인 첸은 무기상인 데옌다를 암살하고 서류를 빼앗는 데 성공한다. 혁명의 경험이 있는 러시아인 카토브가 배에서 무기를 무사히 탈취하여 폭동대를 무장시킨 뒤 무기고 점거, 다리 파괴 등 음모와 암살을 감행한다.
폭동이 성공한 듯했으나 북벌군 토벌을 위해 일시적으로 합작했던 정부군과 중국 공산당의 갈등과 분열이 표면화되면서 국ㆍ공 합작은 결렬될 위기에 놓인다. 이에 북경대학 교수였던 프랑스인 지조르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폭동의 주요 인사인 기요는 인터내셔널 지부로 찾아가서 공산당의 입장을 표명하지만, 대표부는 정부군 장개석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기요에게 무기 반환을 요구한다. 이에 장개석 암살을 계획하게 되고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면서도 고독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첸은 폭탄을 안고 장개석이 타고 있던 자동차 밑으로 뛰어들어 죽고 만다.
한편, 주동자 기요와 카토프도 체포된다. 아버지 지조르와 아버지 친구가 경찰 특무반에 있는 쾨니히에게 기요의 구명을 탄원하고, 쾨니히는 기요에게 배반할 것을 종용한다. 기요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는,
"동지애에 넘친 열리는 속삭임 속에서 죽는 죽음, 참담한 피투성이의 전설이 나중에 찬란한 황금의 전설로 변모할 것이다.” 라며 후대에 이어질 혁명과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청산가리를 마시고 혁명가로서 당당히 죽음을 택한다.
기요가 죽자 그의 아내 메이는 지조르에게 모스크바로 가서 다시 혁명을 시작하자고 한다. 그러나 지조르는 이들 기요의 죽음과 함께 자신에게는 이미 마르크시즘이 죽었다고 하며 가기를 거부한다. 지조르는 아편 속에서 일체의 번뇌와 괴로움을 잊고 관조자적인 삶으로 일관한다.
『인간의 조건』은 혁명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고독과 죽음을 리얼하게 그려놓은 말로의 대표적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인 첸, 기요, 카토프 모두가 생사의 기로에서 인간 조건에 대한 집념의 몸부림을 보인다. 서로 동지애를 느끼면서도 똑같이 깊은 고독감을 벗어나질 못한다. 그러나 폭탄을 안고 자동차로 뛰어드는 첸,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하는 기요, 화형대로 끌려가는 카토프, 이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에 찬 행동은 인간에 대한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아들 기요의 죽음과 함께 혁명에서 떠난 지조르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서까지도 해방되는 관조자로서 일관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한 바는 인간의 조건을 넘어, 즉 자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삶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요와 지조르는 각각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기요는 관념이란 단지 시고의 세계에 멈추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실제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란 ‘그가 한 일과 할 수 있는 일과의 총화’로 파악하고 자신의 숙명과 대결하여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한편, 지조르는 지성을 중시하고 의식적으로는 혁명을 지지하나, 아편에 중독되어 무관심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화가를 통해 동양적 명상에 의한 태평한 세계를 알고, 행동하지 않고도 죽음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행동과 명상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길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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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간유형이 등장한다. 허무주의에 젖은 고독한 테러리스트로서 죽음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첸, 착실하게 경력을 쌓은 러시아인 직업 혁명가 카토프, 그와 반대로 반혁명 세력에 속하는 페랄과 케니히, 지금은 혁명에서 발을 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이자 아편중독자인 프랑스인 지조르. 지조르와 일본인 여성 사이의 혼혈아이자 혁명가인 기요. 기요의 아내 메이가 그들이다.
이 인물들은 전보다 객관성을 띠고 있다. 기요는 고독 속에서 헤매면서도 자기 인생과 사회의 미래를 염려하며, 인간 존엄에 대한 경의와 희망을 품고 있다. 특히 기요가 죽고 나서도 남편의 뒤를 따라 혁명에 몸 바치는 메이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전까지의 수동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을 지닌 여성을 내세우면서 에로티시즘에서 싹트는 사랑을 다룬다.
말로는 이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에서 제목 그대로 근원적인 인간의 조건―고독과 죽음―을 보다 깊이 안팎으로 파고들어 살핀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허무감의 충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인간을 믿고 사랑할 근거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또한 시점을 살짝 바꾸어 보면, 여기서는 제3인터내셔널 즉 소비에트 공산당이 전략적으로 쿠데타를 옹호하지 않았다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나타난 혁명의 고뇌’가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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