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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창학 중편소설 『창(槍)』

by 언덕에서 2014. 9. 4.

 

최창학 중편소설 『창(槍)』 

 

 

 

최창학(崔昌學. 1942 ~ )의 중편소설로 1968년 [창작과 비평]지에 발표된 문제의 데뷔작이다. 최창학은 이 작품에 대해 ‘기존 형식을 완전히 무시한 일종의 실험소설’이라고 적고 있다. 일정한 줄거리도 없고, 일상적인 의식의 흐름이 작품의 전편에 흐르고 있다.

 중편소설 「창」은 글 쓰는 행위 자체가 지니는 미적 자의식이 글쓰기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1960년대 소설이라기에는 대단히 전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요즘 소설의 경향을 이미 45년 전에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평자들에 의해 ‘일상 의식의 흐름을 통해 비틀거리는 이 시대 젊은 정신의 궤적을 그린 보기 드문 문제작’이라는 평(최인훈)과, ‘단순한 외설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김현)을 받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1970년 한 인간에 공존래 있는 선과 악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룬 <라티에 장로(長老)>(월간문학), 혼란한 시대의 단면을 특이한 구성으로 조감한 <휴지>(세대), 가사상태(假死狀態)의 삶에 대한 구원 문제를 한국의 대표적인 신흥종교와 관련시켜 시도한 <적(敵)>을 발표했다.

 최창학은 1971[민음사]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정치 집단의 제물이 된 젊은이의 유배(流配)를 그린 <쫓겨온 서울 쌍지팽이>(월간문학)를 발표했고, 1972년 귀순간첩의 심적 동향을 통해 남북 분단의 비극을 진단한 <먼 소리 먼 땅>(세대지), 숙명에 도전하는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그린 <물결 속>(월간문학), 18년만에 모국을 방문한 재미교포의 눈을 통해 오늘의 한국 현실을 해부한 <방문>(현대문학), 나와 이웃의 삶의 문제를 회화적으로 대비시킨 <구멍>(월간문학)을 발표했다. 의식적인 흐름의 수법을 즐겨 이용하며, 자아의 문제에서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작품마다 문장, 수법, 구성 등을 달리하려 애쓰고 있고, 실험적인 수법과 정통적인 수법을 병용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8년. 서울. 이상(李常)은 불문학을 전공한 문학청년이면서 출판사 교정원이다. 그는 이상(李箱)과 르ㆍ끌레지오의 분위기를 풍기는 지친 의식의 덩어리 같은 존재이다. 자의식 과잉에 빠져 있으며, 정신적으로 심히 앓고 있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자기(인간)는 존재하지 않고 ‘상(인간)’이라는 글자만 존재하는 것 같다는 다분히 현상학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부조리ㆍ무의미함에 대하여 남보다 조금은 더 예민하게 자각할 줄 알 만큼 지적(知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각은 무력한 자각일 뿐이며, 그 자각의 연장선상에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무의미함만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작용할 뿐이다. 그가 하는 나날의 행위나 사고도, 남들과 조금 다른 특이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행위가, 거리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의미 없는 유치한 상상 행위이다.

 그러나 끝내는, 자신이 지나치게 관념 속에 칩거해 있었다는 반성을 하고, ‘세상을 살기 = 속물이 되기‘라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주인공 상에게 오지만, 그 결론의 단순함은 역으로 그가 추구하고 생각했던 것 ―시 쓰기, 자살 따위―이 지극히 관념적이었음을 보충해 줄 뿐이다. 그 깨달음의 허구성이 결국은 이 세상 전체가 ’창‘으로서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공격 콤플렉스를 유발하고 나는 세상에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느낌은 다분히 관념적인 것이긴 해도, 산업화ㆍ기계화되어 가는 집단의 삶 속에서, 개인의 존재의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고, 모두 똑같은 자로서의 익명화되어 간다는 사실에 대한 중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똑같게 되어 버린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기계화에 다름 아니다는 것도 인식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신문엔 한창 심장 이식 수술 최초로 성공, 두 번째 성공, 세 번째 성공, 네 번째 성공, 또는 개(犬) 머리와 뒷다리를 이식하는 데 성공, 머지않아 뇌 이식 수술도 가능 등등의 토픽이 아닌 평범한 기사로 오르내리던 무렵, 상이 꾸었던 밤마다의 악몽은 단순히 무서운 것이라기보다는 희극적인 것이었다. 가령, 자신의 머리와 J양의 머리가 바뀌어져 붙어 있다. 목 이하의 부분은 자기 자신의 것인데, 머리만은 J양의 것이다. 또 가령, 한쪽 눈알을 뽑아 새끼손가락 끝에 달고 다닌다. 사물을 볼 때 그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본다는 등이다.

 

 

 

「창(槍)」은 1968년《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최창학의 데뷔작으로 당시 심사를 맡은 소설가 최인훈으로부터 “일상 의식의 흐름을 통해 비틀거리는 이 시대 젊은 정신의 궤적을 그린 보기 드문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서 산업화ㆍ기계화에 따른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는 예리하고 섬뜩한 것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관념적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약간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최창학은 약간은 공허한 그런 식의 관념적 세계의 이해에서 곧 벗어난다. 그 벗어남은, 이 세상을 어둡게 사는 사람들, 사회학적인 용어를 쓴다면,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방향이다. 동시에 남보다 무언가 더 알고 있고 꿋꿋한 의지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왜곡된 체제 속에서 희생당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상실의 세계를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편소설「창」은 글 쓰는 행위 자체가 지니는 미적 자의식이 글쓰기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1960년대 소설이라기에는 대단히 전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이상(李常)’은 불문학 전공자로 출판사 교정원으로 살아가는데, 잘못 기록된 문자와의 대결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이나 언어에 대한 인식이 첨예하다. 작품 첫머리는 번역어의 외래어 표기를 놓고 고민하는 ‘상’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상’의 언어 인식은 “외국의 알파벳과 우리의 한글 사이에서의 이러한 곤혹을 포함한, 일체의 언어라는 것에 대한 곤혹, 그러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그것을 다룸으로써 그 존재 의의가 비로소 논의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상’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구조화된 언어 시스템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는 인간 존재와 삶의 양태를 주시하는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결들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언어, 구조,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즉 글쓰기란 무엇이며, 글 쓰는 주체인 ‘나’란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우리네 삶의 허상과 이데올로기를 목격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한국 문단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있어 주목을 요한다.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 참여에 둘지 아니면 문학의 자율성을 지키는 데 둘지를 놓고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으로 나뉘던 1970년대에서, 미적 자의식과 당대 현실을 통합하려던 작가의 필력은 현재에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작가의 자의식적 메타 서술,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고 보는 포스트 모던적 사유가 50년 전, 한국에서 이미 출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최창학 :

 194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30년 가까이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쓰는 일보다 가르치는 일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신경숙, 조경란, 천운영, 윤성희, 편혜영, 심상대, 강영숙, 김미월 등 현재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뛰어난 젊은 소설가들을 제자로 두는 행복을 누렸다. 주요 작품집으로《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 《바다 위를 나는 목》, 《몇 개의 낙서를 통한 회상》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가사자의 꿈》, 《긴 꿈속의 불》, 《아우슈비츠》 등이 있으며, 2007년에 퇴임기념선집 《최후의 만찬》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