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대하소설 『지리산』
소설가·언론인 나림 이병주(李炳注.1921∼1992)의 장편 대하소설로 1985년 발표되었다. 일제하 경남지방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부침을 기록한 「지리산」은 이병주의 다른 장편 <관부 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병주의 소설 세계는 사건을 에워싼 상황 전개가 광범위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다채로운 분위기들이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병주의 등단 작품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파란만장한 흥미있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사상적이며 지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과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이들의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해방 전후 지식인들의 고뇌의 흔적이다.
장편소설 「지리산」의 등장인물에는 몰락 지주의 집안 출신으로 일본ㆍ프랑스로 유학하는 이규가 있고 이규의 중학 동창이며 동경 유학생인 박태영이 있다. 박태영은 후에 좌익 남로당원이 되고, 빨치산이 된다. 그 외 만석꾼이며, 딸 윤희와 이규를 결혼시켜 유학 보내는 하영근과 일제치하에서 저항운동를 했고, 후에 공산당원이 된 하준규 등이 주인공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경 유학 중인 수재 태영은 같은 배달부인 무나까와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물들게 된다. 무나까와는 일본 공산당 창설의 시초가 되었던 동경 제국대의 '신인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전향을 거부, 우유배달부로 신분을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는 자였다. 곧 이어 미 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도 청년들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된다. 태영은 이를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하준영이란 선배를 만난 태영은 김숙자를 남겨둔 채 조선으로 돌아와 하준규, 노동식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 곳에서 보광당이라는 집단을 결성하고 식량 비축, 무술 훈련 등을 조직적으로 행한다. 이즈음 지리산 내에는 하준규의 학교 선배인 차범수가 이끄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이규의 숙부와 조선 공산당 창단 멤버인 이현상을 만난다.
1949년 2월, 갑자기 찾아온 순이로부터 태영은 하준규가 월북하고 노동식은 경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찰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의 물자 보급 책임자로 알려진 전태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 1950년 2월, 다시 나타난 순이는 하준규가 인민군 소장이 되어 강원도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해 4월, 태영은 노동식의 동창생인 문남석 형사에게 붙잡힌다. 그는 서울에서 무법 지대인 지리산으로 끌려가기 일보 직전에 고향 후배인 배명근 경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진다. 그러던 중 6.25가 터지고 구치소에 있던 수감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12월이 되자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공비 소탕 작전을 벌인다. 남부군은 악양 전투 실패 이후, 지리산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된다. 1952년 1월 중순에 시작된 2차 공비 소탕 작전 때, 주능선을 넘다가 병력이 60명 가량으로 줄어들고 또 행군 도중 공격을 당해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남조선 최강의 유격대로, 남한 6도 빨치산 부대를 총지휘하던 남부군 사령부는 마침내 30명밖에 남지 않은 부대원을 거느리고 전멸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은 간신히 2차 공세를 벗어나지만 초라한 상태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면서 그 해 봄을 맞는다.
태영은 보급 투쟁 중, 이규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토벌대 대대장으로 있는 주영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대로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 해 3월이 되자 다시 토벌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남부군은 30-40명의 소대 넷으로 재편성되어 개별 행동을 하게 된다. 3차 토벌 작전이 끝날 무렵 남부군은 다시 40명 안팎의 소집단으로 움츠러들게 되고 그 와중에서 낙오된 이태는 결국 국방군에게 투항한다.
박태영은 입당하여 당원으로서 남부군 참모가 되라는 이현상의 권유를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태영이 제안한 도피 전법으로 남부군은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무사히 6월의 공세를 넘길 수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박헌영 계열은 김일성으로부터 종파 분자로 지명돼 숙청당하게 되고 이현상은 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된다. 결국 빨치산에 대한 언급은 일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된다.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현상 일당은 경남 도당으로 이동하던 도중, 미리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이현상을 비롯한 중요 간부가 몰살된다. 이로 인해 박태영은 남은 대원들의 지휘자가 된다. 이영희가 이끄는 경남 부대는 그 해 11월에 전멸한다. 이로 인해 빨치산의 조직적 항거는 종지부를 찍는다. 그럭저럭 1953년을 넘긴 박태영 일행은 그 해 2월 순이를 만난다. 그는 순이로부터 하준규가 체포되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1954년 6월 전대원을 자수시키고 정복희, 순이 등과 함께 산에 남는다.
일제강점기 경상도의 작은 도시 진주에는 수재 소리를 듣는 박태영과 이규라는 두 친구가 있다. 그 도시에서 천재라는 불리는 박태영은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정면으로 충돌하며 대항하는 사람이지만 이규는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노력가로 다소 현실 타협적인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며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이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계기로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뛰어난 두뇌로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만 하면 출세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박태영은 허드렛일 일을 하며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다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고 결국 혁명을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규는 자신보다 뛰어난 박태영이 진학하지 않는데 자신만 공부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상급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시대를 외면하는 듯한 자신의 모습에 가책을 느끼나 결국 자신을 지원해주는 하 선생의 딸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다른 사상과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이지만 서로의 영역과 생활을 존중해주며 둘은 끝까지 우정을 지킨다. 그러나 박태영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
이 대하소설의 대단원은 작가의 에필로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이규는 1956년 1월 프랑스에서 귀국한다. 그는 형무소에 있는 순이로부터 박태영, 정복희가 1955년 8월 31일 지리산 청학동에서 경찰에 포위된 채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되고 자신만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순이 역시 전향을 거부하여 이후 사형된다. 숙자는 태영의 아들을 낳는다.
이 작품은 우리의 생생한 역사를 배경으로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유려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 「지리산」은 가장 격동기였던 일제 말기에서부터 민족 해방, 6·25 동란을 거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그 격동의 현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평가나 관점에 다양한 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지리산」은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민족사적 과업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숱한 인간사, 승자가 되지 못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빨치산들, 그리고 역사의 행간에 묻혀 버린 숱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민족의 대하드라마이며, 민족의 뼈저린 아픔을 형상화한 민족 대서사시라는 소설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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