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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한설야 장편소설 『탑(塔)』

by 언덕에서 2009. 6. 7.

 

한설야 장편소설 『탑(塔)』  

 

 

월북작가 한설야(韓雪野.1900∼1976)가 지은 장편소설로 1940년 8월 1일부터 1941년 2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42년 매일신보사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후, 1989년 [풀빛사]에서 <한설야선집> 3권으로 출간하였다. <청춘기)>(동아일보.1937)와 함께 작가의 자전적 색채가 강한 가족사소설의 구조로 되어 있다.

 한설야는 광복 후 평양에서 활동하면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김일성의 북한정권 창출에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치활동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에 단편소설 <승냥이>, <모자>, <혈로> 등과 장편소설 <설봉산> 등 북한소설의 전범이 되는 작품을 창작하여 북한 문학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북한의 내부권력 숙청기에 김일성의 후광을 바탕으로 전위적 역할을 하였으나, 소련의 스탈린 격하시기에 북한에서의 반김일성 세력에 동조하다 발각되어 노동교화소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그의 공식적 죄목은 일제 하 군수의 자식으로 부화방탕한 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북작가 한설야(韓雪野 .1900&sim;1976 )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가의 소년시절의 체험을 담아 조선 말기, 러일전쟁 직후의 격변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가 고향인 함흥에 칩거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집단적 이념의 추구를 다루었던 기왕의 경향과는 달리 주로 개인사적 탐구의 성향을 띤 작품이다. 묵은 관습이나 제도가 무너지고 외세에 의하여 전통적인 정서나 가치가 사라져 가는 현실을 다소 감상적이고 심정적인 태도로 서술하였다.

 특히 함경도 지방의 풍물과 시속의 묘사가 돋보인다. 양반 행세를 하며 세도를 잡은 박 진사가 의병 홍범도(洪範圖) 때문에 군수로 부임하지 못하고 달아나고, 돈 많은 과부를 첩으로 얻고 광산을 경영하여 치부하는 과정, 집안의 양자와 정을 통하다 아이를 배고 미쳐 죽은 소녀의 이야기 등 다양한 세태의 풍정을 다루었고, 우길과 게섬, 우길의 조모 등에 대한 인물 묘사가 비교적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일 자산가의 등장이나 세태 묘사가 작가의 일정한 비판적 시각이나 거리에 의하여 형상화되지 못하고, 특히 주인공과 대립적 관점을 설정하지 않은 평면적인 구성이 비판되기도 하였다.

 둘째 아들 우길에 의하여 아버지 세대가 극복될 수 있다는 암시가 다소 비중 있게 제시되어 있지만, 이 또한 식민시대 암흑기에 대한 작가의 현실인식의 추상성을 드러낸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탑>은 단순한 세태소설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우길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여종 게섬의 죽음은 우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우길은 형 수길과 달리 여종을 차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타락한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자 한다. 아버지와의 대립은 동생 이순의 혼인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길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박 진사는 수길의 혼사를 술집에서 결정해 버리고 딸 이순의 혼사도 자신의 개간지 공사 자금 융통을 위해 성사시키려고 한다. 이처럼 우길의 가출 원인 중 하나는 형 수길과 아버지가 여자에 대해 지니고 있는 그릇된 사고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 박 진사는 몰락하는 봉건 지배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새로운 시대 분위기를 타고 개간지 사업과 철광 사업에 손을 대어보지만 점점 가운이 기울어진다. 이에 반해 친일 자본가 송병교는 일제의 비호로 신흥 부르주아로 성장해간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 사회가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편입되어 가는 당대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음미될 만하다.

 이 소설은 자전소설의 분위기를 풍긴다. 박진사라고 하는 구체제(舊體制)에서 한다하는 양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라가면서 새로운 물결을 이곳저곳에서 맞이하며, 옛날 가치관을 대변하던 완고한 아버지의 몰락도 함께 지켜본다.

 당시 결혼풍속이 나오는 부분이 아주 맛깔스러웠고 여자들의 수다짓거리도 아낙들의 방에 끼어든 것처럼 능청스럽기 그지없다. 시집못간 종년의 넋두리랄지, 새며느리가 직접 지어오는 도포 이야기랄지, 새신랑을 달아매고 괴롭히며 추근대는 습속이 잡힐 듯이 묘사되어 있다. 정월 아낙네들의 놀이풍속 단편들 하며 시어미 험담들을 꼭 여인네들마냥 구절구절 잘도 써 놨다.

 새신랑의 첫날밤을 엿본 과년한 종년 계섬이의 불퉁대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쩟, 신랑이란 보기부터 뒷간에 선 수숫대 모양으로 키만 덤부룩하지 실속이 있나. 히히. 글쎄 신부 어르는 꼴만 좀 보아, 그게 무어여, 하다못해 그년을 허리라도 벋디디고 이년 치마끈을 놓지 못할테냐 하고 떼서리를 부리지 못해..."

하고 계섬이는 개똥 나무라듯 헐뜯고 나서 다음으로 또,  "신부란 건 또 무어야, 신랑이 손을 잡으려니까 글쎄 이거어째 이러우 하고 성을 내니. 그년이 이 집에 무엇하러 왔어. 참 기가 막히지." 하고 또 그 다음은 이 집 늙은것, 젊은 것을 두루거리로 막걸어서, "망할 연놈들 저걸 그래도 자식이라구 장가를 보내. 이 늙고 젊은 연놈들아, 나를 한번 족두리 씌워 봐라, 어떻게 하나" 하고 욕지거리를 하였다. 계섬이는 본시 밸머리가 사나운데다가 또 우길이가 제집 식구를 마구 악다구니하는 것을 닮아서 하다못해 뒤에 돌아서서라도 이따금 악담을 퍼부어야 약간씩 결이 삭는다. 이담에 시집을 가서 이 집 문턱만 벗어나면 하다못해 허잽이라도 송장처럼 일곱 묶음을 매어서 이 집 마당에 파묻어 주리라 하였다. 그러면 저를 제일 구박하고 못살게 굴던 연놈부터 죽어 자빠지리라 싶었다.

 동네 아낙들이 새신부 앞에 놓고 시어미 험담하는 자락에 이런 것이 있다.

 "그러게 (시어미가) 욕 하는 걸 무슨 회심곡 부르는 소리로 들어야지 살지. 그렇지 않으면 속이 발바닥이라도 못 견디어. 천하 없는 소진장의라도 시어머니는 못 당하니까. 그리게 애당초 귀야 너는 남의 것이니라 하고 못들은 척 해야지, 허구한 날 살어갈 순 없지."

 아버지인 '박진사'라는 사람을 통해 가부장제도 하의 여러 모습도 엿보게 된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자녀, 특히 딸의 경우는 거의 부친의 소유물 개념에 가까웠던 것이다. 서울양반의 규모대로 살려고 그곳 풍습대로 종을 들였다는 내용에서 시작해서, 딸들의 혼사를 물건 치우듯이 결정해버리는 태도와 그것이 수용되는 분위기는 요즘과는 너무나 다른 세태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우길이가 아버지의 빚 대신 억지로 시집가게 된 여동생을 몰래 데리고 가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1942년 매일신보사 출판부에서 간행한 단행본

 

 한설야의 주인공들은 싸우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시난고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선동한다기보다는 버티는 사람들이다. 정통 카프문학의 흐름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사람네 살이가 칼로 자르듯이 이론대로, 구호대로 되는 게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냥저냥 버티며 살아가는 내몰린 사람들의 모습을 덤덤히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탑(塔)』은 1942년 매일신보사에서 출간된 연재소설로 일제강점기 한 청년 ‘우길’을 통해 반봉건적인 세태적 가족사와 일본 세도가 지주와 피지배 하층민 사이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전통사회와 시대적 변혁기의 여성 지위와 식민지하 몰락하는 지배층의 지배적 시련과 구속의 난세에서 해방과 근대적 신여성의 심리적 풍조를 그린 가족사 소설이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여, 무력해진 프로문학의 전통을 살려보려는 의욕이 담긴 장편 <황혼>(1936)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유행하는 지식인의 불안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삶의 현장을 취급한 그의 대표작이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전향자의 좌절과 현실타협의 논리가 작품상에 대두함으로써 그의 현실변혁 의식이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다.

 1940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 『탑(塔)』이 한말 전환기의 전체상을 다룬 중량감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형상화에 미홉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의 노선에 반발하여 이기영ㆍ송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자, 월북하여 초기 북한문단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