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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소설가 박완서

by 언덕에서 2007. 4. 25.

 

소설가 박완서 (1931. 10. 20 ~ 2011. 1. 22) 

 

 

 

 

 

여류소설가.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국어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여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종교는 천주교로서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이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작품 경향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다루거나 소시민적 삶을 그린 내용이 많으며, 후기 작품 역시 1988년 병사한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을 비롯해 어린 시절과 전쟁 중 경험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2) 등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주요 저서로는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잃어버린 여행가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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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에세이 - 나의 길> - 동아일보(1991. 3. 10)

 

나는 지금은 휴전선 이북인 개풍군 청교면의 박적골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래 윗말 합쳐도 이십호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근교 지방의 주거 양식이 다들 그렇듯이 비록 초가이나 사랑채와 안채가 번듯하게 나누어져 있고 너른 뒤란과 앞 뜰에선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쉬지 않고 꽃들이 피었다 지곤 했다.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없다. 조부모님을 비롯해서 여러 숙부 숙모 사촌들아 한솥밥을 먹는 대가족 사이에서 귀염도 넉넉하게 받았으므로 별로 아버지가 그리워 청승을 떨거나 하지도 않고 태평스럽고 구김살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이 나른하고 닫힌 세계로부터 스스로 돌파구를 꿈꾸기에는 아직 먼 겨우 여덟 살 적에 나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그 고장을 상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의 사인은 맹장염이라고도 하고 탈장이라고도 했지만 그건 나중에 해 본 현대 의학적인 추측이고 급작스러운 심한 복통을 무당과 한약 침 등으로 다스리려다 안 돼서 달구지에 싣고 이십 리 밖 개성까지 왔을 때는 이미 복막염이 손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후였다고 한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과부가 된 어머니는 자식만은 몽매한 시골에서 빼내 대처에서 길러야겠다는 한 서린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당시 대가족의 종부(宗婦)로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을 저지르셨다. 먼저 오빠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한 어머니는 어느 날 나까지 데리러 와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공들여 빗겨준 내 종종머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통수를 허옇게 밀어붙이는 단발머리로 만들어 놓았다. 해괴한 머리 모양에 울상이 된 나를 어머니는 서울 아이들은 다 그런 머리를 하고 있다고 욱박질렀다. 그 머리로 사랑에 들어가 할아버지한테 하직 인사를 올리니 할아버지는,

  “허어, 해괴한지고. 뒤통수에도 또 얼굴이 달리다니.”

  큰소리로 일갈하시고 나서 오십전짜리 은화를 한 닢 던져주셨다. 은화가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와 할아버지의 일갈은 최초로 모욕당한 기억으로 내 자존심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상경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개성까지의 이십리 길은 어린 나에게는 힘겨웠다. 고개를 넷이나 넘어야 하는데 마지막 고개가 농바위 고개였다. 허위허위 농바위고개 정상에 오르니 발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정갈한 도시가 펼쳐졌다. 나는 숨도 크게 못 쉬고 그 정돈된 도시에 무작정 이끌렸다.

  “저기가 바로 송도란다. 그렇지만 서울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지.”

  당신이 마치 서울의 주인인 양어머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보는 대처에 대한 나의 친화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떤 네모난 건물이 사방으로 내쏘는 주황빛 빛살이 어찌나 무섭던지 나는 어머니 치마꼬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매달렸다. 어머니는 그건 유리창이 햇빛을 되쏜 거라면서 서울에서는 집집마다 봉창이 그런 유리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내가 처음 만난 도시 문명은 고혹적이면서도 어딘지 날카롭고도 흉흉한 적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시의 서울에선 한참 변두리인 서대문 밖 현저동 꼭대기 빈촌의 사글셋방에서 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다. 그런 극빈한 처지에 꿈도 크지, 어쩌자고 딸자식을 소학교부터 서울에서 시킬 엄두를 내셨는지. 어머니의 교육열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로서는 희귀한 학군 위반까지 서슴지 않았다. 소학교도 시험 봐서 들어갈 때였지만 시험칠 수 있는 학교는 거주지 근방으로 제한돼 있었다. 빈촌 학군에 속한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어머니는 나의 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집으로 미리 옮겨 놓고 매동국민학교에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시험칠 때도 그랬지만 붙은 후에도 어머니는 시골뜨기인 내가 집을 잃어버렸을 때 기억해야 할 정말 주소와 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어보았을 때 대답해야 할 사직동의 가짜 주소를 행여나 헷갈릴까봐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고 느닷없이 물어보기도 해 더욱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실제로 그런 걸 물어 보는 일은 없었지만 마치 굉장한 범법처럼 그 일을 저지른 어머니는 거기 지나치게 신경을 썼고, 나 또한 그 일에 우울하게 짓눌려 지냈다. 두 개의 주소의 헷갈림보다도 그때까지 받아온 정직을 으뜸으로 삼던 가정교육과 내가 해야 할 거짓말과의 헷갈림이 여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눈 뜬, 사람 사는 형편엔 수많은 층수가 있고 나는 그 최하층에 속한다는 자각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든 어머니의 몇십 년을 앞지른 유별난 교육열 덕에 나는 계속해서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고, 나보다 나이 차가 많은 오빠는 어머니를 도와 일찍이 자수성가를 이룩해 빈촌을 면하고 중산층의 반열에 끼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결혼해서는 내리 아들 손자만 안겨드렸으니 어머니는 그릴 것이 없었다. 오빠가 세상을 변화시킬 꿈을 꾸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내가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하고 나서 얼마 안 잇다 6ㆍ25가 났고, 오빠가 마치 바라던 세상을 맞은 양 활기에 넘친 것도 잠시, 곧 갈팡거리기 시작했고, 먼저 정신적으로 허물어지고 나서 결국은 죽음으로 이념의 갈등을 마감했다. 나는 학업을 단념하고 생활 전선에 나섰다가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오남매나 낳고 내가 생각하기에나 남들 보기에나 팔자 좋다고 일컬어질 만큼 평탄하게 살았다. 그러나 내 속에선 항상 6ㆍ25의 상처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사십 세란 좀 늦은 나이에 시작한 소설쓰기도 6ㆍ25의 악몽을 배설해 내려는 몸부림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동아」를 통해 등단할 당시만 해도 일년에 한두 편쯤의 깔끔한 단편을 문예지에 발표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게 수줍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 후 독자들의 과분한 사랑에 힘입어 나도 모르게 다작하는 작가가 되고 말았고, 6ㆍ25 얘기도 어지간히 울거먹었다. 그래도 살아있는 한 6ㆍ25세대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걸 이번 걸프전쟁을 통해서도 서글프게 실감했다.

  같은 인간이 엄청나게 죽어 가는 걸 흥미진진하게 또는 전후의 잇속에 침 흘리며 관전하는 세상 인심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죽어가고 우리의 운명이 엉망진창이 될 때도 남들이 저렇게 재미나게 구경했으려니 하니 새삼스럽게 노엽고, 무더기로 살해당하는 게 전자오락 화면 속의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제각기의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핏줄로 사랑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줄창 늘어붙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6ㆍ25세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6ㆍ25를 주제로 대작을 쓰긴 틀렸다고 여기고 있다. 너무 가까이 늘어붙어 있는 대상의 전모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6ㆍ25 얘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대작을 쓸 위인이 못된다. 요즈음 출간한 내 장편소설 광고에 대하소설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 그 과장됨이 못내 쑥스러웠다. 어디 길다고 대하소설인가. 나는 역사의 장강을 꿰뚫어 보거나 관조할 만한 역량이 모자라고 다만 그 장강의 한 줄기가 내 개인사를 어떻게 할퀴고 지나갔나를 진술하는 데 급급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런 의미로 나는 철두철미한 소설가일 뿐 대설가가 아니다.

  88년엔 남편과 사별하고 난 지 얼마 안 있어 다시 오남매 중 외아들을 잃는 참척을 겪었다. 그 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나와 도대체 내가 뭘 말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더욱 참혹하다. 남들은 회개도 잘 하고 양심 선언도 잘 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이런 모진 벌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뭘 그다지 잘못했는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도무지 내 탓이오가 안 된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살았대서가 아니라 부모가 먼저 죽고 자식이 나중 죽는 것은 평범한 사람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순리라고 여겨서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당한 남다른 역리가 부끄럽고 사람을 피해 혼자 있어도 하늘 땅이 부끄럽다. 예전부터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들이 그 애를 잃고 나자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 것도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낯섦이어서 남들과 조화를 이루는 데 불편할 적이 많다.

  다행히 남은 자식들이 창의 불빛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지척에서, 수프가 식지 않을 만한 이웃에서, 이 나라 끝에서, 혹은 지구의 반대 방향에서 돌봐 주고 걱정해 주어 살아나가는 데 힘이 돼 주고 있다. 나는 자식들과의 이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좋아하고 가장 멀리, 우주 밖으로 사라진 자식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도 있는 신비 또한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여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 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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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씨 담낭암 투병 중 별세 (조선일보 2011. 1. 22 자)

 

 소설가 박완서(80)씨가 22일 오전 6시17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치료를 해왔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개성의 외곽 지역인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문인으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40세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전쟁과 분단 등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겪으며 청춘을 보낸 고인은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자신의 깊은 상처를 되새기며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써왔다.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그는 평생 시대의 아픔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영원한 현역 작가'로 불리며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살아있는 날의 시작',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친절한 복희씨' 등 장편을 남겼다. 소설집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그 남자네 집', '잃어버린 여행가방', '세가지 소원'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호미' 등이 있으며 지난해 7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기도 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받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2006년 문화예술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유족으로 장녀 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 발인은 25일 오전이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02)3410-6916.

 


 

[소설가 박완서 별세] 폭력의 기억··· 지독한 내면의 상처, 모성적 삶과 문학으로 보듬어 (한국일보 2011.1/23)

송용창 기자 hermeet@hk.co.kr

 

 

 "나는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2010) 중) "마음 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 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한국일보 기고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002) 중)

한국 문단의 어머니였던 소설가 박완서씨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무엇을 꼽으라면 저 구절 속에 녹아있을 듯하다. 스무 살 때 겪은 6ㆍ25전쟁의 참혹했던 경험, 그 상처를 '복수'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보듬어 안은 그의 글에서, 상처받은 뭇 영혼들도 제 이야기를 듣는 듯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타계 후에야 딸 통해 심사평 전해

 

1970년 늦깎이로 등단해 지난해 7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기까지, 거의 매년 책을 낸 '영원한 현역'이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가 떠난 22일은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최종심사 날이었다. 1월 초 심사위원인 그에게 후보작 15편을 보냈던 염현숙 문학동네 편집국장은 "몸이 편찮으시면 심사를 안 하셔도 된다고 전했는데, 며칠 전 '원고 다 읽었다'는 연락이 왔다"며 "타계 후에야 따님을 통해 심사평을 받고는 선생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젊은 문인들과 함께 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담낭암 진단과 함께 숫술을 받았으나 경과가 좋았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계였다. 지난 17일 선생의 댁을 찾았던 소설가 이경자씨도 "항암 치료를 받고 계셨지만 눈빛이 맑고 초롱초롱했다. 어서 완쾌해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라고 말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그는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했다.

 

6·25 전쟁이 남긴 뿌리 깊은 상처

 

 "살면서 얻은 느낌으로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했던 세대의 대표주자였다. 그가 문학하고자 했던 이유이자 그의 글 바탕을 이루는 원체험은 6ㆍ25전쟁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조부모의 손에 자랐던 그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한 1950년 동란을 맞았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의 가족은 '빨갱이로도 몰리고 반동으로도 몰리는' 이념 갈등에 휘말리고, 의용군으로 나간 오빠가 세상을 뜨는 등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다. "6ㆍ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6ㆍ25가 없었다면 내가 글을 썼을까" 등 여러 자리에서 그는 전쟁이 트라우마임을 밝혔다.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삼은 등단작 <나목(裸木)>(1970)을 비롯해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2002) 등 많은 작품들이 자전적 요소를 지렛대 삼아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다뤘다.

 

치유로서의 모성적 사랑

 

 그 상처 속에서 그를 붙들어 매준 것은 가족의 사랑이었다. 유년기 조부모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랑, 1953년 결혼 후 그 자신 어미로서 다섯 자녀를 키우며 화목한 가정을 꾸렸던 경험은 그의 모성적 문학의 원류였다. "난 악인을 그리는데 능숙하질 못해요. 혈육에 대한 사랑, 그 때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됐던 것 같아요."('문학의 문학'2010년 봄호). 마흔에 뒤늦게 등단한 것도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70~80년대 <휘청거리는 오후>(1977) 등 비열하고 폭력적인 중산층 남성의 이기적인 욕망과 허위의식을 꼬집은 세태소설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들도 이 모성애가 바탕이었다. "나더러 페미니즘 작가라는 사람도 있던데 페미니즘은 읽어봐도 모른다"던 말처럼, 그의 문학은 '이즘'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왔다.

 1988년 남편에 이어 서울대 의대생이었던 아들을 잃은 참척(慘慽)의 슬픔은 그의 삶을 다시 뒤흔들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와 신을 향한 원망으로 술에 파묻히기도 했던 그는 가톨릭에 귀의해 슬픔을 이겨냈고, '당신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는가'라는 보편적 상처에 대한 사유로 이어져 그의 글은 더욱 원숙해졌다.

 

좌우를 아울렀던 삶

 

 이념 대립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는 그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문단의 좌우를 아울렀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과 맞서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그는 대표적 보수 문인인 소설가 이문열을 옹호해 일각에선 보수로도 몰렸다. 그는 문단의 왼편에 선 실천문학사가 어려워지자 "문학의 비판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실천문학이 바로 서야 한다"며 <아주 오래된 농담>(2000) 등 2권을 실천문학사에서 내기도 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정치적 패거리주의, 그 밑에 깔린 거짓과 허위의식이었다. 실천문학사 주간인 손택수 시인은 "선생의 포용과 중용엔 상처 받은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신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세상살이의 폭력성은 끝나지 않았건만 그의 글은 이제 멈췄다. 남은 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는 마지막 책 제목처럼 더 이상 억압의 찌꺼기로 글을 쓸 필요가 없는, 가보지 못한 더 아름다운 곳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