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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삶 -- 소설가 조명희(趙明熙)

by 언덕에서 2007. 3. 30.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삶 -- 작가 조명희(趙明熙)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소설보다 더 소설적으로 살다간 소설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명희...소설가ㆍ극작가. 호는 포석(抱石), 필명은 적로(笛蘆) 이다. 조선왕조가 쇠잔해가고 있는 1894년 충북 진천(鎭川)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고, 이때 친구들과 시 창작과 연극공연을 전개했다.  1923년 [동명]에 <영혼의 한 쪽>, [개벽]에 <잔디밭 위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도 데뷔한다. 문학활동은 <김영일의 사(死)>(1921) <파사(婆娑)>(1923) 등 현실과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 <영혼의 한쪽 기행> 등 서정시를 쓰다가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하여 이기영·한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1927년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하였다. 1928년 소련을 동경하여 망명, 니콜스크에 살면서 대작 <만주의 빨치산>을 썼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로는 한인촌 교사로 일했고 연해주 한인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에 글을 발표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遠東) 지부 간부를 지냈으나, 1937년 소련 헌병에게 끌려가 1942년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총살된 것으로 전한다. 죄명은 스탈린의 탄압정책의 와중에서 일본간첩이라는 혐의였다.

 1988년 중앙 아시아 한인 거주지역인 타슈켄트에 문학기념관이 세워졌다.

 조명희는 충북 진천에서 가난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당하기도 하고, 일본에 유학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극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게〉(개벽, 1926. 2)·〈농촌사람들〉(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1925년 카프(KAPF)에 참가한 그는 이기영, 한설야와 함께 사회주의를 공부하기도 하고, 바로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1928년 소련에 망명하기 전까지 그는 짧은 3년 동안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소설 기법을 활용하여 프로문학의 제2기를 이루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망명 이후 조선인 교포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때마침 소련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문학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붉은 깃발 아래서> <만주 빨찌산>이란 장편소설을 썼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그는 1942년 망명지인 소련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원인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스탈린의 탄압 정책으로 감옥에 갇혀 지내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대표작 '낙동강'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소련에서는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 〈짓밟힌 고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 〈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했다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이렇게 말한다.  

 “조명희의 일생은 편의상 동경 유학 시절과 후의 서울 시대, 그리고 망명 시대로 나눠 보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동경 유학 시대는 시와 희곡이 전부였고, 서울 시대는 주로 소설이, 망명 시대는 모든 분야의 글들이 있긴 하지만 서울 시대의 작품에서 더 진전된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조명희 그는 암울한 식민지에서 태어나 민족의 해방과 가난한 농민들의 참된 삶을 추구하는 소설을 썼으나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쫓기듯 떠나야 했다. 거기서도 그는 재차 좌절을 겪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동경하던 소련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