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백범 암살범 안두희

by 언덕에서 2007. 4. 4.

 안두희(安斗熙.1917∼1996.10.23)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 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예편되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그 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ㆍ19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1년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시역의 고민>(1955)

    

 

  <안두희 살해범 징역 3년 확정>

 

- [동아일보](1997. 11. 17)

  대법원 형사2부(주심 정귀호 대법관)는 17일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씨를 살해한 박기서(朴琪緖ㆍ47ㆍ버스운전사)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안두희에 ‘심판’ 내린 응징자들>

 

 - [동아일보](1999. 3. 11)

  50년대엔 거리를 활보했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씨는 60년 4ㆍ19혁명 직후 [백범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위원장 김창숙ㆍ金昌淑)가 결성되면서 ‘도망자’가 된다. ‘법적 시효’로부터는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역사의 시효’를 믿으며 그를 응징하려는 사람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1965년 12월 20대 후반의 청년이던 곽태영(郭泰榮ㆍ63ㆍ백범독서회회장)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고 있던 안씨를 공격한다. 그는 칼로 안씨의 목을 두 군데나 찔렀으나 안씨는 세 차례에 걸친 뇌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났고 그때부터 ‘심판자’들을 피해 더욱 필사적인 은신에 들어갔다. 민족정기구현회회장인 권중희(權重熙ㆍ63)씨는 ‘집요한 응징자’였다. 15세 때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을 민족혼으로 받아들였다는 그는 80년대초 안씨가 미국이민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추적에 나섰다.

  권씨는 87년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안씨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91년 한 차례, 92년 세 차례에 걸쳐 응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암살배후에 대한 안씨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ㆍ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박씨의 집에서는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등 백범 관련서적 10여 권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