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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묵자의 사상과 배경

by 언덕에서 2007. 2. 1.

 

 

묵자의 사상과 배경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공수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민 출신인데도 기술이 뛰어나서 대부 자리에까지 올랐다. 공수반은 아무리 높은 성에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름까지 닿을 만큼 사다리를 제작해 놓고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제나라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꼬박 열흘을 걸어 초나라로 왔다.

 "선생은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습니다?"

 "북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하는데, 당신이 그 사람을 없애 주었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공수반은 아주 불쾌해했다.

 "그렇게 해 주면 천금을 드리지요."

 "나는 의기가 있는 사람이라서 남을 죽이지 않습니다."

묵자는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탄복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반에게 두 번 절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당신이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던데 송나라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땅과 백성이 남아돌 정도로 많으면서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더구나 죄 없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합니다. 지혜롭지도 어질지도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임금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잘못임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면 강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한 사람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왜 많은 송나라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묵자의 말을 들은 공수반은 잘못을 뉘우쳤다. 하지만 이미 구름사다리 공격 계획을 왕에게 보고한 뒤라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다고 난감해했다. 묵자는 공수반과 함께 초나라 왕을 만났다. 묵자가 왕에게 말했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이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넉넉하고 풍요로운 초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도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께서는 포악하다는 비난만 듣게 될 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수반은 내게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반드시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소." 

 묵자는 허리띠를 끌러 땅에다 원형으로 둘러놓고 그 안에 들어가 선 다음 품속에서 첩이라는 이상한 도구를 꺼냈다. 그리고는 공수반더러 모형 구름사다리를 이용해 공격해 보라고 했다. 공수반이 아홉 가지 방법을 써서 공격했지만 묵자는 다 막아내었다. 공수반의 공격 기술이 바닥이 났는데도 묵자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방어 기술이 여럿 남아 있었다. 공수반이 묵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생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는 하지만 말하지 않겠소."

 "나도 당신이 얘기하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만 얘기하지 않겠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공수반의 생각은 저를 죽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만 죽여 없애면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송나라에선 제가 훈련시킨 제자 300명이 이 도구로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죽여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초나라 왕은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묵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 묵자가 매우 실천적인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에는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를 집어삼키는 겸병 전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대다수 약소국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큰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민중들의 고혈을 짜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으며, 성을 쌓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우는 일 또한 민중의 몫이었던 것이었다.

 묵자는 대다수 피지배 민중과 약소국의 편에 섰다. 그는 강대국과 지배 집단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라고 외쳤다. 묵자가 주장한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었다. 묵자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결사까지 만들었다. 당시로 볼 때 묵자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그는 민중의 편에 가장 가깝게 선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 피지배층의 지배자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묵자는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든다. 묵자는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 맹자보다 조금 앞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묵자는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그만큼 묵자의 사상이 지배층에게 반가운 사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묵자의 성이 본래 묵 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묵(墨)'자에는 검다는 뜻이 있고, 또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먹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그가 묵형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묵 씨라 불렸다고 주장한다. 묵형이란 죄인의 얼굴에 죄명을 먹으로 떠 넣는 형벌을 말한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도둑질을 하면 얼굴에 '도(盜)'자를 문신처럼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주나라에서는 지배층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피지배층에만 형벌을 가했다. 그렇다면 묵자는 형벌로 다스려지는 하층민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 씨라 불렸다고 한다. 오늘날 노동자를 블루칼라라고 부르듯이, 피부가 검다는 것은 그가 노동을 하는 계층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묵자는 피지배 계층이었던 것 같다. 묵자의 주장 속에 먹줄 같은 노동 도구들이 비유로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또한 그의 사상을 따른 그룹이 대부분 하층 무사 집단이나 기술자 집단이었던 점도 묵자의 출신 계층을 짐작하게 한다. 공자는 전설적 제왕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높였는데 반해 묵자가 기술과 효용을 중시했음을 보여 준다.

 묵자도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곧 공자를 배격하고 새로운 주장을 세웠다. 공자의 사상이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묵자의 사상은 일관되게 피지배 계층을 옹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묵자 사상은 피지배 계층의 엄청난 호응을 받아 공자 이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맹자가 "세상에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가득 찼다"라고 한탄한 것을 보면, 당시 묵자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비자, 순자, 장자 같은 책에서도 '유묵'이라고 하여 유가와 묵가를 나란히 놓고 있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많은 도구들을 개발했다. 한 번은 그가 3년 동안 공들여 만든 정교한 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 '하루 걸려 만든 수레보다 쓸모가 없구나'하고 개탄했다고 한다. 묵자는 그런 점에서 철저한 공리주의자였다. 묵자가 만든 도구 가운데는 전쟁 무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였다. 묵자가 만든 방어용 무기들은 약소국 제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송나라의 대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묵자의 사상을 볼 수 있는 책이 <묵자>이다. <묵자>는 본래 71편이었다고 하는데 18편이 없어져서 오늘날에는 53편만 남아 있다. 묵자 자신이 쓴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한다. 대화체로 된 글도 있고 논문 형태의 글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방어 위주의 병법이 11편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것과 6편이 논리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점이다. 특히 논리학적 내용이 담긴 6편을 묶어 '묵변'이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묵자>에는 수준 높은 고대 과학 기술의 성과가 들어 있다. 도구 제작에 관련된 기하학, 빛의 굴절 등에 대한 광학적 분석 등도 보인다.

 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을 펼쳐 보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힘 있는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부국강병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 이후 중앙 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묵자 사상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서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초점을 맞추어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 강철 같은 조직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거자라고 불렀는데, 거자는 구성원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회남자>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묵자를 따르는 무리는 180명인데, 그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면 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건, 칼날을 밟고 서는 일어건 절대 주저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또 <사기>에서도 묵가 집단의 무사들은 말이 믿음직하고 용감하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묵가 집단의 초대 지도자가 바로 묵자였다. 묵자 집단은 거자를 뽑을 때 선임 거자가 지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기도 했다. 집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으며, 하급무사나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집단적 결속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예속적 지위를 벗어나려 했다.

 그들의 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들은 비좁은 방에서 살았고, 기둥에 조각을 하거나 벽을 화려하게 꾸며서는 안 되었다. 음식은 흙으로 빚은 그릇에 담긴 옥수수나 조밥, 그리고 국 하나뿐이었다. 옷도 여름에는 베옷, 겨울에는 사슴 가죽만을 입어야 했다. 노래나 오락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장례도 얇은 관 하나만 가지고 검소하게 치러야 했다.

 그들은 이런 금욕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켜야 했고, 오로지 남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규율을 어겼을 때는 조직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았다. 구성원 중 누가 어떤 나라에 가 벼슬을 하면 봉록의 일부를 집단에 바쳐야 했다. 어떤 사람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묵가 집단의 금기 사항인 공격 전쟁에 참가했다 하여 거자로부터 소환당하기도 했다. 

 묵가 집단의 엄격한 조직력을 잘 보여 주는 일화를 두 가지 소개하겠다.

 진나라의 복황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황은 나이도 많은 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황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만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황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거자 맹승은 형나라의 양성군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양성군은 맹승에게 성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왕의 장례에 참석하러 갔다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그러자 형나라에서는 양성군의 땅을 몰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맹승은 양성군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묵가 집단에게 성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한 제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가 여기서 모두 죽는 것은 양성군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그러다간 묵가 집단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묵가의 지휘권은 송나라에 있는 전양자에게 계승할 것이니 묵가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양성군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그 누도 묵가 집단과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맹승은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자결했고, 맹승과 그 부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전양자에게 거자 자리를 넘겨준다는 맹승의 서신을 전하러 간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신을 전하고 나서 전양자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제 다시 돌아가 싸우다 죽겠습니다."

 전양자가 그들을 말렸다.

 "이제는 내가 거자이니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나 두 사람은 극구 돌아가서 자결하고 말았다(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인 행동은 후대 묵가들에 의해 거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자어에 묵수(墨守)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끝까지 지킨다는 뜻인데, 이 말은 묵가 집단의 이러한 행동 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군인과는 달랐다. 보통 군인이라면 어떤 전쟁이든 가리지 않고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오직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방어 전쟁만이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또 보통 군인들에게 군인이란 지위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에 불과했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군인 생활이 자신들의 철학을 실현해 가는 실천이었다. 일반 군인들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묵가 집단은 전쟁의 윤리를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으로 높여 갔다. 이 점은 묵자와 공수반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인과 의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다. 어느 날 공수반이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해전에서 상대방의 배를 잡아당기는 갈고리와 상대방의 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밀대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걸핏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데 선생이 떠드는 인의에도 내가 만든 갈고리나 밀대 같은 것이 있소?" 

 "내가 만든 갈고리와 밀대는 당신이 만들어 낸 것들보다 더 훌륭한지요. 나는 사랑을 이용해서 남을 끌어들이고, 겸손을 이용해서 남을 막아냅니다. 사랑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고, 겸손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에게 대들게 되지요."

 평범한 기술자의 논리와 묵가 집단의 논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한 군인이나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조직의 동지들이었다. 사실 묵가 집단의 결속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 집단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은 무엇이었까? 그들 철학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묵자는 겸애의 반대를 별애라고 했다. 겸애가 무차별적인 사람이라면, 별애는 차별적인 사랑이다.

 그러면 묵자는 무엇으로부터 겸애 철학을 끌어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는데, 어떤 학자는 묵자의 무차별적인 사랑 철학이 바로 이 하급 무사 집단의 행동 양식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면 특히 묵가 집단처럼 방어 전쟁을 할 때 성벽에 둘러서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성의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결국 다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바로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동락하던 체험을 철학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이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친구를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반대로 차별적인 사랑이라면 자신을 위하듯 친구를 위할 수 없으며,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 부모를 위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증명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 보자. 맡은 임무가 위험하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모른다면, 당신은 처자식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이 당신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당신 가족보다 자기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적은 수를 괴롭히고,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리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두를 겸애, 즉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묵자는 맹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 나갔다. 바로 묵자의 이러한 사랑을 가리켜 겸애라고 하는 것이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묵자 사상의 이런 점을 가리켜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묵자는 그 같은 차별애가 사회 혼란을 가져오고, 급기야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따져 보자고 주창했다.

 묵자는 이를 따져 보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옛날부터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해오는 사람들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다.

 둘째,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결과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묵자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피지배계층의 입장에 판단의 토대를 두고 있다. 이처럼 논리적인 묵자의 주장을 피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에 문화적 훈련을 쌓을 기회가 적었던 대다수 묵가 집단 성원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 왔다. 하늘의 뜻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통치자 역시 백성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가 하늘의 뜻을 잘 따라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 하늘이 상을 주고 복을 내리지만, 안 그러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미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온 것일 뿐이다. 묵자 사상에서 하늘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점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묵자가 운명을 부정하고 사치스러운 장례나 제사를 반대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묵자는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력한 통치는 전제 군주의 막강한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묵자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묵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각기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의 결정을 마을 사람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했다. 마을들이 모인 큰 부락에서는 각 마을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부락의 우두머리로 삼고, 더 나아가 여러 부락이 모인 지방 단위에서는 각 부락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지방의 우두머리로 삼자고 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천자는 온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뜻은 하늘의 뜻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천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묵가 집단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거자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제도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에는 당시 춘추 전국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서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숨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묵자의 사상은 집단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가 비판

 

 

 현대의 관점에서도 묵자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유·묵이라고 병칭 된 이유는 두 사상 사이에 대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묵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지내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긴 유가의 예제를 반대했다. 그 까닭은 장례가 너무도 화려해서 마치 이사 가는 사람 같으며, 이것이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산업이 부진해지고, 그동안은 아이도 안 낳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해서 정의의 전쟁에 필요한 사람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묵자는 유가의 악, 즉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다. 악기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생기는 이익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화려하게 장사 지내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지배층뿐이었으며, 묵가 집단은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었다. 묵자가 화려한 장례나 음악과 노래, 춤을 반대한 것은 지배 계층의 특권을 부정한 것이며, 그 까닭은 이런 일들이 모두 피지배 계층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묵자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였다.

 셋째, 묵자는 운명론을 반대했다. 당시 사람들은 명(命)을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명(天命)이라고 불렀다. 천명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중 운명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었다. 묵자는 자기가 운명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본뜻은 세습에 의한 차별성을 반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세상이 평안할 것인가 혼란할 것인가, 부자가 될 것인가 가난할 것인가 등을 모두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 신분과 부를 세습하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묵자는 운명이란 포악한 임금이 만들어 낸 궁색한 자기변명이며, 나아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운명이란 것을 본 사람이 없을뿐더러, 세상 모든 일은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고, 운명을 믿으면 노력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세습적 신분제에 반대했다. 지배층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며 피지배층이 끝내 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재를 쓸 때 차별을 철폐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넷째, 묵자는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유가에서 말하는 하늘은 모든 것을 낳은 생명의 근원이자 도덕의 뿌리였다. 그러나 묵가의 하늘은 겸애의 실시 여부를 살피는 감독의 기능이 강했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상과 벌로 평가 결과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묵가의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주장이지만, 묵자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싣기 위해 '신령한 하느님'을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반전 평화론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왔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차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 자기 집안,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람 때문에 생긴 침략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력한 구호도 작은 실천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묵가 집단은 그러한 전쟁에 맞서는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떤 학자는 묵가 집단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방어전을 위한 전쟁 청부업이라고도 표현했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묵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지배 집단을 도둑에 비유했다. 남의 집에 들어간 좀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남의 나라를 침략한 큰 도둑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고 비난했다. 또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어쩐 일이냐고 반문했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노력은 첫머리에 소개한 일화에서 보았듯이 눈물겨울 정도이다. 묵자는 그 밖에도 제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노나라에 대한 침략을 막았고, 초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막았다. 묵자의 전쟁 반대 의지는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 꿈으로 남은 묵자의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다. 그는 당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지배 계층을 향해 똑같이 사랑하라고 외침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확보하려고 했고, 서로 나눠 갖자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적 수탈에 대항했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는 지배층의 음악, 노래, 춤을 반대했고, 화려한 장례를 반대했다. 현실적인 지배를 운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지배 논리에 맞섰고, 강자의 영토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침략전을 막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고 싸우기까지 했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통일의 기운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았을 때는 많은 약소국들이 묵자의 뛰어난 방어전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묵가 집단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이 깨져 몇몇 강대국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면서부터 묵가의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왕권이 안정되자 묵자 사상은 완전히 소멸하고 묵가 집단도 없어졌다. 다만 그 뒤로는 협객들의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 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 나갔을 뿐이다.

 묵자 사상이 소멸된 원인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묵자 사상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맹자는 묵자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가 자기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묵자의 유가 비판에 대한 유가의 대응이었던 셈인데, 사실 묵가와 유가 사이의 이러한 대결 의식은 묵가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당시는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자유로운 대립이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이어 중국을 평정한 한나라는 유가 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묵자의 철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묵자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다. 묵자의 사상은 2500여 년 전이라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사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묵자가 피지배 계층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공격 전쟁을 의미하게 되고, 공격 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 묵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내부적 요건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 불과 십수 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아왔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심이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묵자도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묵가 집단을 강철 같은 대오로 이끌어 갔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주된 동력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었다. 즉 팽팽한 긴장이 강한 단결력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춘추 전국의 혼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혼란의 종말은 지배 집단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혁명 이론이 없는 묵자의 철학이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탱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틈을 이기적 욕구가 그대로 놓아둘 리도 없었다. 결국 2500여 년 전 중국의 획기적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