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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전래동화 '콩쥐팥쥐'의 지리적 배경은 어디일까?

by 언덕에서 2007. 2. 1.

 

전래동화 '콩쥐팥쥐'의 지리적 배경은 어디일까?

 

 

서양의 동화 '신데렐라'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조선 시대 작가 연대 미상 우리의 전래동화 『콩쥐팥쥐』 설화는 권선징악을 소재로 한 가정소설로 유명하다. 주요 내용은 조선 시대 중엽 전라도 전주 서문 밖 30리 부근에 사는 퇴리(退吏) 최만춘이 부인 조 씨와 결혼하여 딸 '콩쥐'를 낳았으나 콩쥐 어머니 조 씨가 일찍이 병사하자 '팥쥐'라는 딸을 데리고 온 배 씨와 재혼하면서 계모와 전처소생의 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구전으로 전해오는 신데렐라형 서사물이다.

 

영화 [콩쥐팥쥐], 1958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 중엽 전라도 전주 부근에 사는 퇴리(退吏) 최만춘(崔滿春)은 아내 조씨와 혼인한 지 10년 만에 콩쥐라는 딸을 두었다. 그러나 콩쥐가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최만춘은 과부 배 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계모는 자기의 소생인 팥쥐만을 감싸고 전처소생인 콩쥐를 몹시 학대하였다. 나무 호미로 산비탈의 돌밭 매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루 만에 베를 짜고 곡식 찧기 등의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시켰으나 그때마다 검은 소ㆍ두꺼비ㆍ직녀 선녀ㆍ새 떼 등의 도움으로 콩쥐는 맡은 일을 해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직녀 선녀가 준 신발의 인연으로 감사와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콩쥐는 팥쥐의 흉계에 넘어가 연못에 빠져 죽게 되고, 팥쥐가 콩쥐 행세를 하였다. 그 뒤 연꽃으로 피어난 콩쥐가 계속 팥쥐를 괴롭히다가 마침내 감사 앞에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하였다. 감사가 연못을 물을 퍼내 콩쥐의 시신을 건져내니 콩쥐는 도로 살아났다. 감사는 팥쥐를 처단하여 배 씨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본 계모는 놀라서 즉사하였다.

 

▲ 거북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구암리가 콩쥐의 아버지‘최만춘’이 살았던 동네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거북바위가 있는 구암마을 입구. (그 뒤로 콩쥐가 은혜를 입은 산이라 해서 붙여진 두은산이 있다.) - 사진 출처: 전북일보

 

 

 

 팥쥐와 새어머니 배 씨는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삶을 살았다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국적 배경 서민들의 소박한 소망을 나타내는 설화이다소설로는 대창서원판태화서관판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소설 콩쥐팥쥐전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민담이 소설화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콩쥐팥쥐의 작가가 개연성 있는 허구로써 상상의 세계를 그려놓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콩쥐팥쥐 설화의 실제 배경이 김제시 금구면 둔산마을 등 옛 금구현 일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주 서문 밖 30리가 전주 중화산동 인근 서문에서 신작로가 나기 전 김제시 금구면 둔산마을 주변으로 콩쥐의 아버지 최만춘과 최 씨의 후처이자 팥쥐의 어머니인 배 씨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다.

 금구면 둔산마을은 전주 최씨가 약 540여 년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마을 동쪽 250여m 지점에 팥죽이 방죽이 있다. 이 방죽은 현재는 이서면 앵곡 마을에 속해 있으나 1914년 4월 1일 군 폐합 전 관할구역이 김제군 금구면 대화리에 포함되었다. 팥죽이 방죽은 최씨 집성촌 후손들이 오랜 세월 가뭄에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로 활용되어온 웅덩이로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한편 소가 설화 속에 등장하는 것은 둔산마을의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혈(臥牛穴) 형상으로 지금의 서둔 쪽이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둔산마을의 최씨 여인들은 암소와 같이 온화한 심성으로 다른 마을 주민보다 묵묵히 쉬지 않고 순종하며 열심히 일을 잘해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모든 일을 주도해 나가고 있으며 이 마을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남쪽으로 향하여 해가 뜰 때부터 서산에 질 때까지 그늘진 곳이 없이 온종일 해를 맞이하는 특성이 있다.

 또한 와우혈(臥牛穴) 머리 부분 지형에 500여 년 된 소나무 암수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나 10여 년 전에 숫 소나무가 죽었다. 둔산 최씨들은 숫 소나무가 죽으면 남자들이 단명한다고 하여 1995년도에 숫 소나무를 다시 심어 현재 암수 소나무가 둔산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치 소가 엎드려 거북바위에 있는 콩쥐의 옛집을 지켜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거북이가 항아리를 막았다는 이야기는 옛날에는 이곳이 마을 터로 ‘대섶들’ 또는 ‘묵은들’로 불렸으며, 둔산마을 동남쪽 입구에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바위로 둘러싸여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항아리 밑을 막아 주던 거북이가 돌로 변하여 지금까지 거북바위로 내려오고 있다. 원래는 이곳이 콩쥐가 살았던 최만춘의 본가이고 이 부근에 주민들이 살았으나 상류 지역의 많은 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방을 쌓으며 둔산마을과 구암 마을 등으로 이주하였으며 거북바위 옆 마을이 현재의 구암(龜岩) 마을이다.

 김제시 금구면 둔산 앞에 콩쥐의 꽃신을 떨어뜨렸던 두월천이 흐르고 있는데 두월천은 이 마을과 300여m 떨어져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물줄기로 물의 특성상 북에서 남으로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것과는 정반대로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물이 거꾸로 흘러 생명수의 근원처럼 여성적인 마을임을 증명하고 있다. 애초에는 앵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구성산 기슭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농토를 적시면서 흐르는 물줄기로 2개의 물줄기가 있었는데 두월천의 하천직선화공사로 현 위치로 옮겨 하나의 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과 전해 내려오는 지역의 명칭을 설화와 비교하여 볼 때 김제시 금구면 둔산마을, 구암 마을, 팥죽이 방죽이 콩쥐팥쥐 설화의 고향일 가능성과 잠재력이 아주 크다. 특히 이 설화에서 콩쥐의 선행에 탄복해 밤과 은행 등 과일로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금구면에는 지금도 큰 밤을 상징하는 대율리(大栗里)가 있으며, 금구면 산동리 부근 일대 지명이 부모로부터 효를 배운다는 부교리(父敎里)와 효자가 불구가 된 어머니를 위하여 정자를 짓고 편히 모셨다는 효정리(孝亭里)가 위치하여 일대의 지형을 실감이 나게 하고 있다. 팥쥐가 콩쥐를 유인하여 밀어 넣은 연못 두죽제(豆粥堤)는 한글의 한문 표기로 팥쥐 방죽이 변형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풀숲으로 뒤덮여 전설로만 전해오는 사연들을 안고, ‘수심이 깊으니 수영금지’라는 푯말이 팥죽이 방죽을 지키고 있다.

 팥죽이 방죽 옆길은 지금은 오솔길에 불과하여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있으나 신작로가 나기 전 호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큰 길목이었으며 전주까지는 걸어서 30리로 전주 서문에서 30리는 역사기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곳에 주막집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옛 어른들의 기억으로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곳 주민들의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가 옛 금구현 둔산 일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인 권선징악의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해온 숭고한 민족정신의 뿌리로 우리 고장에서 발생하고 열매 맺어 전승되었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콩쥐팥쥐의 실제 고향임을 실감하게 한다.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지명과 역사적 고증,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전주 최씨의 집성촌, 구암 마을, 팥죽이 방죽, 거북바위, 와우혈, 대율리 등의 금구현 둔산 일대가 『콩쥐팥쥐』 설화의 주요 무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