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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원일 장편소설 『겨울골짜기』

by 언덕에서 2025. 3. 24.

 

 

 

김원일 장편소설 『겨울골짜기』

 

김원일(金源一, 1942~ )의 장편소설로 1986년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은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바탕으로 선한 인간과 극한 전쟁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전한다. 작가는 문한돌과 문한득 형제의 시점을 교차하며 전쟁의 피해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또한 소설은 주인공 문한돌의 가족을 중심으로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문한돌의 형 문한병은 전쟁 직후 보도연맹 예비검속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아우 문한득은 초모병으로 입산하여 315부대 소속 빨치산이 된다. 빨치산의 엄한 사상교육과 고된 훈련, 추위와 굶주림, 거창군 일대 점령 상황 등을 문한득의 시점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빨치산 생활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그들도 민족공동체의 일부분이었으며 전쟁의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소설적으로 확인했으며, 반전과 휴머니즘적 시각으로 전쟁과 분단의 비극성을 새롭게 환기한다. 소설의 저변에는 전쟁 와중에 상실된 민족적 삶의 원형적 공간 회복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깔려있다.

『겨울 골짜기』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이 행해진 그 날, 막 출산한 아기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문한돌 일가를 중심으로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총 6개 장에서 빨치산으로 산에 있는 한득과 마을에 있는 한돌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며 좌익과 우익 어느 한 쪽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특히 그때까지 금기시됐던 빨치산이란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데다 그들을 인간으로 복권시켜 그들도 민족 공동체의 일부였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념과 무관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고통 받고 참혹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에서 전쟁의 비극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문한돌의 가족이 전쟁 중 피난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문한돌의 가족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그의 형 문한병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다. 아우 문한득은 초모병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고, 문한돌의 아버지는 전쟁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인민군에게 끌려간다.

 문한득은 빨치산으로서 엄격한 훈련과 사상교육을 받으며 전쟁의 현실과 마주한다. 문한돌은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문한돌의 가족은 피난처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지내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 돕고 의지한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한다.

문한득은 빨치산으로서의 신념과 인간적인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다.

 거창 지역에서 미군과 국군에 의해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문한돌의 가족도 이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문한돌의 가족은 큰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며,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극에 달하며,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다. 특히, 한돌의 어머니와 누이가 학살 현장에서 겪는 참혹한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문한돌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문한득은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며 깊은 절망에 빠진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깊은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소설은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된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이어가려는 모습으로 끝난다.

소설가 김원일 ( 金源一 , 1942~ )

 

『겨울 골짜기』는 김원일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가 겪었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전쟁 소설을 넘어서, 이념의 갈등과 그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전쟁 중 민간인들이 겪는 고통과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려 했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이념의 대립 속에서 희생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겨울 골짜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한돌의 형 문한병은 전쟁 직후 보도연맹 예비검속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아우 문한득은 초모병으로 입산하여 315부대 소속 빨치산이 된다. 빨치산의 엄한 사상교육과 고된 훈련, 추위와 굶주림, 비역질, 거창군 일대 점령 상황 등을 문한득의 시점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1951년 2월에 실제로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이 사건을 통해 문한돌 일가가 겪는 고난을 그린 작품이다또한 한국전쟁 당시 이념 갈등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인공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내걸어야 했던 문한돌 가족의 긴박한 상황과 양민학살의 현장 등을 통해 한국전쟁의 무시무시한 실재를 전율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국은 한국전쟁과 그 전쟁의 잔혹함의 기원에 대한 어느 것보다도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1951년 2월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에서 일어난 양민(良民) 대량학살사건(大量虐殺事件).
   6ㆍ25전쟁 후 지리산(智異山)을 근거지로 하고 출몰하는 공비(共匪) 소탕을 위해 주둔하였던 국군(國軍) 제11사단(師團) 제9연대(聯隊) 연대장(聯隊長) 오익경(吳益慶) 대령(大領), 제3대대(大隊) 대대장(大隊長) 한동석(韓東錫) 소령(少領)의 청야결벽(淸野潔壁) 작전에 의해 감행된 것으로, 동년 3월 29일 동군(同郡)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보고로 공개되었다.
   동년 2월 11일 동 대대장 직접 지휘로 산원면 지구의 포위작전(包圍作戰)을 개시하는 동시에 누차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소개(疏開)하지 않은 부락민(部落民)을 신원초등학교(神院初等學校)에 집합케 한 후 다음날인 12일 동군(同郡) 경찰서(警察署) 형사(刑事)와 정보장교(情報將校)들로 하여금 군경 공무원과 유력인사들의 가족만을 가려낸 귀, 신원면인민위원장(神院面人民委員長) 변영택 이하 187명에 대하여 한동석 대대장 주심으로 연대본부 작전명령(作戰命令) 제5호 부록에 의해 군법회의(軍法會議) 간이재판(簡易裁判)을 개정(開廷), 사형(死刑)을 언도, 박산(朴山)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그 후 국회에서의 국방ㆍ내무ㆍ법무의 보고 내용이 서로 상치되어 국회조사위원단을 파견, 정확을 기하려 하였으나, 당시 헌병사령관(憲兵司令官) 겸 경남지구(慶南地區) 계엄민사부장(戒嚴民事部長)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小隊)로 하여금 공비(共匪)를 가장9假裝)하여 위협적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음폐(陰蔽)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년 5월 8일 국회는 비합법적 행형(行刑)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 공개함으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 결과 당시 내무ㆍ법무ㆍ국방의 3부 장관은 사임하였고,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동 사건의 직접 책임자 김종원(파면, 전급료 몰수, 징역 3년-구형 7년)ㆍ오익경(무기징역-구형 사형)ㆍ한동석(징역 10년)ㆍ이종배(3대대 정보주임, 少尉, 무죄)에게 각각 선고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1960년 5월 11일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유족(遺族) 70여 명이 보복적(報復的)으로 당시의 면장(面長)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生火葬)하는 참사(慘事)가 벌어졌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




  1951년초 한국전쟁의 전세는 중공군의 대공세로 매우 암담했다. 후방 역시 산간지역은 공비의 출몰로 어수선했다. 그해 1월 10일 아침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 소재 신원국민학교 교정은 잔뜩 겁에 질린 주민들로 가득찼다. 이곳에 진주한 11사단 9연대 3대대 장병들이 공비 토벌을 이유로 면내 7백여 가옥을 불사른 뒤 주민들을 모이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중 1백여 명을 공비와 내통한 통비분자(通匪分子)로 지목, 탄량(呑樑)골로 끌고 가 죽였다.
   군인들은 이튿날 군경 가족들을 가려낸 뒤 5백여 명을 더 학교 뒤 박산골로 끌고 가 죽였다.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피살된 7백19명 중 절반이 유아를 포함한 14세 미만이었다.
  천인공노할 이 같은 학살사건은 오늘날 북한에서 ‘김일성을 하눌님’이라며 아첨을 떨고 있는 당시 사단장 최덕신(崔德新)의 ‘건벽청야작전(建壁淸野作戰)’에서 비롯됐다. 손자병법을 따랐다는 최(崔)의 지시는 ‘가옥을 불지르고 주민을 공비와 격리시키며 작전지역내의 사람은 모두 사살하라’는 것.
  이 사건이 알려지자 국민과 국회는 크게 놀라고 분개했다. 정부 안에서도 조병옥(趙炳玉) 내무(內務), 김준연(金俊淵) 법무장관(法務長官) 등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과 관련자 엄벌을 건의했으나,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현지에 가 보니 사실무근이더라’고 허위 보고, 발뺌을 했다. 신 국방은 진상이 드러날 것을 우려, 김종원(金宗元) 대령에게 사병들을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 조사단에 총격을 가하게 함으로써 조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등 이 사건의 또 다른 악명을 기록했다.
  그 뒤 당국의 위협 때문에 숨죽여 지내던 유족들은 4ㆍ19 후 합동묘를 축성하고 위령비를 건립했으나, 5ㆍ16 후에는 당국이 묘비를 땅에 묻는 등 다시 수난을 겪었다.

                                                    - [한국일보](1989. 10.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