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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순원 단편소설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

by 언덕에서 2025. 3. 14.

 

 

 

이순원 단편소설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

 

이순원(李舜源. 1958∼)의 연작소설 <수색, 그 물빛 무늬>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으로 1995년 발표되었다. 1996년 제27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으로, 어머니와 아들 두 세대 사이에 아로새겨진 섬세한 마음의 무늬를 가족사적 배경에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이순원의 작품세계는 <수색> 연작들을 전후로 하여 성격을 달리하는데, ‘압구정동’ 시리즈를 비롯한 ‘수색’ 연작 전의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가 높은 작품이고, 연작 이후의 작품들에선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높게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순원의 후기 작품들이 작가의 사적 체험을 소재로 하면서도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가치의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다.

 이순원의 소설은 한국 전쟁과 같은 사회 문제를 새로운 이야기 전개 기법을 사용하여 다루고 있다. 그가 작품 속에서 그리고 있는 인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약한 듯하지만, 그 내부에 남다른 의지와 용기, 그리고 지혜를 감추고 있는 인간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강릉 참판댁으로 불리며 봉건적 영화의 마지막 세례를 누리던 분이지만, 아버지가 시앗을 보자 아버지 몰래 시앗을 1년 반 동안 거두면서 배다른 자식을 보지 않기 위해 셋째인 나를 그녀에게 떼어주어 친자식처럼 키우도록 한다.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그 여자가 마침내 수색으로 떠나자 나는 서자 의식으로 방황하게 된다. 성냥내기 화투놀이에 열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10년 만에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우리 가족은 고향인 강릉에 왔다. 아내와 어머니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병원에 가고 아버지는 없어진 화투 한 짝을 찾으려 애쓴다. 5년 전 고향에는 엄청난 눈이 왔다. 우리 시대 최고의 눈을 직접 볼 꿈에 젖어 있던 나는 출발 직전 생긴 사정으로 내려가지 못한 기억이 내내 섭섭하다. 자궁근종으로 밝혀진 어머니는 한사코 자궁적출 수술을 거부한다. 어머니는 다섯 자식을 낳은 자궁을 들어내는 것은 다음 생에 자식들과 다시 만날 장소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병실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그 여자에 관한 말을 처음으로 꺼내며 어머니로부터 수술 승낙을 받아낸다.

소설가 이순원 (李舜源. 1958∼)

 이 소설은 봉건적인 가족제도를 지켜온 마지막 세대인 어머니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강인한 모성으로 가정을 수호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어머니에게 자궁은 자신의 신앙인 자식을 담았던 신전이다. 때문에 자궁의 적출은 생명의 포기보다 두려운 것이다. 아내의 둘째 임신으로 어머니의 자궁적출을 위로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자궁을 모태로 한 모자관계는 분리될 수 없는 자아의 공유관계임을 표현한다.

 이 소설은 ‘수색’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에서 오는 문학적 상상력과 화투놀이, 엄청난 눈을 모티프로, 한 가정의 가족사를 서정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가족사에 그치지 않는다. 김진달 노인에 얽힌 일화와 농약을 먹고 죽은 그의 최후, 작품에 언급된 사라져 간 많은 것들에 대한 추억은 독자를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이순원은 한국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스란히 간직한 압구정동의 욕망과 타락을 파헤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1992), 1990년대 식 사랑의 청순함과 사랑을 통한 삶과 의식의 성숙을 담은 <미혼에게 바친다>(1995), 옛것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현대사회를 비판하며 가족의 화해와 유대를 보여주는 <수색 그 물빛 무늬>(1996), 이야기체 소설의 형식으로 한 불구 사내의 인생을 서사적으로 전개한 <해파리에 관한 명상>(1998), 시골학교의 정겨움과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이 담긴 <첫사랑>(2000) 등 다수의 소설집을 간행한 바 있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이전의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비판의 발언이 강하다면 그 이후의 작품들은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있게 반영되고 있다.

 이순원은  [문학사상 신인상](1988), 소설 <수색, 어머니 가슴으로 흐르는 무늬>로 제27회 [동인문학상](1996), 중편소설 <소>로 [MBC(문화방송) 6ㆍ25 문학상](1996), 소설 <은비령>으로 제42회 [현대문학상](1997), 소설 <그대 정동진에 가면>으로 제5회 [한무숙문학상](2000), <아비의 잠>으로 [이효석문학상](2000), 제2회 [남촌문학상](2006) 등을 수상했다.